역사신문 사설-광해군 비판을 반박함

입력 2004-09-20 09:02:19

'광해군은 선왕인 선조를 독살하고 형제를 죽였다.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했다.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오랑캐인 여진에 군대를 투항케 해 국가의 면목을 떨어뜨렸다.

'

서인들과 인목대비가 인조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주장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광해군이 선왕인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조로 삼았다가 후에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를 교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많은 대신들은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때 마침 선조가 승하하자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조사에서도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광해군은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살해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인목대비와 서인들도 이 부분에는 강한 자신감을 보인다.

그러나 영창대군의 살해 방식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오히려 서인측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많다.

태워 죽였다, 얼려 죽였다, 독살했다 등.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모두 등장한다.

이미 죽은 영창대군을 몇 번이나 죽여서 누가 득을 취할는지는 자명하다.

서인들은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했다.

광해군이 창덕궁을 비롯해 임진란으로 불탄 궁궐을 재건한 것에 대한 비판은 납득하기 힘들다.

궁궐 재건은 작게는 왕실의 체통을 위한 것이고, 크게는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작업이다.

광해군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사업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은 쿠데타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짜 맞춘 듯 하다.

여진과의 관계도 비난 일색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조정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 외교 덕분에 명과 후금의 전쟁 속에서도 조선은 큰 화를 입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전란에 휩싸인다면 조선은 수렁으로 빠져들 게 분명하다.

새로 권력을 잡은 서인 세력은 중립 외교를 버리고 후금(여진)에 적대적인 외교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국가의 외교정책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다.

광해군을 배제한 상태에서 명과 후금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나라의 정책이 왕실 내의 한풀이를 근거로 출발해서는 안 된다.

특히 광해군은 임진란 당시 18세의 나이로 강원도 등지에서 백성들과 함께 전쟁을 수습했던 장본인이다.

그는 전쟁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임금이었다.

그가 즉위 3년 만에 창덕궁을 중수하고,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을 그대로 유임시켰던 점, 일본과 국교를 다시 열고,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점은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독주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감을 근거로 국가정책을 펼친다면 영창대군과 임해군 피살, 인목대비 유폐, 광해군 폐위 등 최근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보다 훨씬 큰 국가적 재난을 부를 것이다.

조두진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