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8월의 꽃, 백일홍

입력 2004-08-21 11:05:38

매미는 목청이 뚫어져라 마지막 울음을 다하고 있다.

무슨 한이 그렇게도 많은지 까마귀같이 운다.

팍팍 울어대는 매미군단 속에서도 배롱나무(나무백일홍)는 진분홍색 꽃을 하늘 끝까지 뿜어 올리고 있다.

싱그럽다 못해 안쓰럽기도 하다.

백일홍(배롱나무)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관청의 뜰에 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당이나 사찰 등에서 관상수로 심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가로수, 정원수, 조경수 등으로 많이 심는다.

꽃이 지속적으로 피고, 생명력이 강하고, 순박하고 고고한 자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흔히 이 나무를 교화(校花)로 상징하기도 한다.

문화재청에서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 소재 800년 가량 된 배롱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산림청은 백일홍을 2004년도 8월의 꽃으로 정했다.

여름내 장마와 찜통 더위를 거뜬히 이겨 꽃을 피운다.

배롱나무(백일홍) 꽃은 한 송이가 피어 그토록 오래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지속적으로 쉼 없이 꽃을 피우는데 그 기간이 약 100여 일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백일홍(百日紅)이라 했던가. 원래 백일홍은 공해와 건조에는 강하지만 매서운 추위와 강풍에는 약하다.

그런데도 한겨울 추위를 맨몸으로 버티고, 봄이 되어도 잎을 쉽게 내밀지 않는다.

지조 있고 고결한 기품을 지닌 나무다.

백일홍은 사람이 일부러 심지 않으면 스스로 번식할 수 없는 나무다.

그리고 이 나무의 매끄러운 줄기를 긁어주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간지럼을 타기 때문에 충청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간지럼나무', 제주도에서는 '저금 타는 낭'이라 부르기도 한다.

며칠 전에 환상적인 배롱나무 꽃을 구경하기 위해 경북 울진군 백암온천으로 떠났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승용차 지붕 위에 무거운 햇살이 내리꽂혔다.

그래도 마음은 설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백일홍 꽃길에 흠뻑 취해 본다고 생각하니 포동포동한 전설(傳說)이 가슴을 씻는다.

차창 밖에는 시퍼런 벼가 그리움 한데 모아 서로 어깨를 부비고 있었다.

동해안 국도를 달린 지 5시간 남짓 지나 울진 백암온천 진입로에 다다랐다.

온천까지는 약 12㎞쯤 된다.

울진군에서는 이 곳을 백일홍 꽃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9천여 그루을 심었다고 한다.

이따금 불어오는 먼 산정(山頂)의 소금기 묻은 바람에 손수건을 풀었다.

무수히 쏟아 내리는 자유, 그 자유의 끝에 서서 마른 노래를 깊게 불렀다.

수려한 꽃 터널로 들어가기 위해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지류에 서서 가슴을 가다듬어야 했다.

꽃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미끈한 줄기가 주는 그 특유의 시원한 느낌 때문에 오래 전부터 여름 꽃나무로 자리매김되어 온 터라 기대가 컸다.

산과 계곡 그리고 꽃과 함께 걷기 위해 승용차에서 내렸다.

백일홍의 레이스 같은 작은 꽃잎들이 아득히 길을 열었다.

몸을 휘감을 듯한 정겨운 계곡을 끼고, 싱글벙글 걸어가는 동안에 산 그림자가 가끔 내 등을 덮기도 했다.

문득, 붉은 단풍을 보고 감탄한 정비석의 수필 '산정무한'이 내 머리를 스쳤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주홍색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는 그 표현이 실감났다.

기대한 대로 8월의 꽃 백일홍은 모습이 고풍스럽고 꽃술이 화려했다.

무더기로 핀 꽃은 풍요롭고 생명력이 강해 보였다.

진분홍색 꽃과 미끈한 줄기의 아름다움을 그 무엇에 비하랴?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러대며 8월의 꽃 백일홍의 화려한 모습을 사진기에 담다보니 손가락 끝에서 별이 돋았다.

캄캄한 밤하늘을 쳐다보니 갑자기 30여년 전 내 아버지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우리집 뒷마당에 대대로 자라온 배롱나무를 정성을 다해 가꾸시다 훌쩍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이제 가을이 오면 8월의 꽃 백일홍은 떠도는 바람의 울음소리를 거두어야 한다.

누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배롱나무는 100여일이나 톡톡 튀는 땡볕 뒤집어쓰고 꽃을 끈질기게 피우지 않는가. 이유환 시인.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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