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또 하나의 정지선

입력 2004-06-15 13:31:51

이른바 '쓰레기 만두' 때문에 온 나라안이 시끌시끌하다.

소비자들이 만두 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니 만두가게들은 휴.폐업이 속출하더니 그예 만두제조업체 사장의 자살에까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불량만두 업자들의 잘못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참에 우리도 뭔가 되돌아 볼 것이 있지 않을까. 얼마전 한 기업체의 공익광고에 실린 글귀가 왠지 양심을 찌른다.

"'도시락'을 '곽밥'으로 부르는 북녘사람들이 묻습니다.

음식쓰레기가 무어냐고 묻습니다…. 우리돈 '100원'이 없어 배를 곯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묻습니다.

'음식쓰레기'가 무어냐고 묻습니다…".

불과 이, 삼십년전만 해도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 어느 하나 허투루 버리는 법이라곤 없었다.

쌀 뜨물로는 숭늉을 끓였고, 채소 이파리 한 장도 썩은 부분만 떼어내고 요리조리 이용했다.

여름철, 그늘진 곳에 매달아 둔 보리밥이 쉰 냄새라도 풍기면 물에 씻어 남비에 자작자작 눌려 새 밥처럼 만들어 먹었다(그런 밥은 늘상 엄마들 차지였지만).

뒤란에 떨어진 풋감일랑 뜨물에 삭히면 그런대로 먹을 만했고, 도저히 먹기 힘든 풋사과도 사카린을 넣어 삶으면 새큼달큼한 맛이 군것질거리가 될 만했다.

심지어 설거지 뒤 몇 알 남은 밥알과 반찬찌꺼기도 마당 한귀퉁이에 묻어두었다 화단의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그 시절 엄마들은 모두가 뛰어난 재활용 선수들이었다.

배고픔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전상국씨는 '1951년 봄, 어머니'라는 짧은 수필에서 피난지의 수용소에서 주린 배로 인한 처절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이불보따리가 경계선이 된 이웃집에서 누군가 죽었지만 그 가족들은 시신을 담요로 덮은 채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쌀 배급량이 줄어들 것을 겁냈기 때문이었다.

굶기를 밥먹듯 했던 거기서 네살배기 동생을 땅에 묻고 온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동냥얻어온 밥을 빼앗듯이 가로채 아귀아귀 먹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묵묵히 내려다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더라고, 그 장면을 가슴아프게 회상하고 있다.

그런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에겐 음식물 버리는 것은 죄 짓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는 논어 구절은 몰랐어도….

며칠전, 월드비전 주관 기아체험 행사에 6천여 명의 중고생들이 참가해 24시간 굶주림을 체험했다.

자신이 딱 하루 겪는 고통을 연중 수시로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아프더라는 청소년들이 대견해보인다.

버리기를 밥먹듯이 하는 요즘의 우리. 마음 속에 또하나의 '정지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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