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제대로 건전하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가 언어이다.
민족이 독자성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공통된 언어의 사용임은 물론이지만 어떤 특정한 집단, 예를 들어 특정분야 전문가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그 분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전문용어를 알아야 된다.
의사 소통이란 말소리로 표현되는 부분뿐 아니라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바로 해석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나라에서나 국어교육은 역사교육과 함께 국민교육과정의 핵심을 이룬다.
소리로는 같은 말을 쓰더라도 그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르면 진정한 의사 소통이 되지 않으며 사회는 여러 가지 오해로부터 빚어지는 엄청난 낭비, 혼란, 갈등에 빠져들게 된다.
정치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은 지금 엄청난 언어의 혼란에 빠져 있다.
이것은 대통령의 말이 한 나라의 지도자답지 않게 거칠다거나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말들이 보통말을 파괴하고 있다거나 하는 차원을 크게 넘어서는 이야기다.
평범한 말들이 본래의 뜻을 잃고 잘못 사용되거나 아니면 모호한 신조어들이 사람들을 현혹시켜 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현상이 더 큰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친인척의 호칭이 말의 인플레의 희생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아무나 다 언니고, 어머님이며 오빠는 남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남자 고객은 으레 사장님, 회장님이고 일등상은 특등상, 특별상 등에 깔려 아주 낮은 것이 되어버렸다.
본래 한문에서 나온 개념을 표현하는 말에 이르면 혼란은 가중된다.
작은 정성을 담은 선물이란 말을 겸허하게 표현하는 뜻의 '촌지'가 아예 교사에게 주는 돈 봉투로 쓰이기 시작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개혁' '진보' '서열화'등 다소의 정치적 의미를 내포한 용어에 이르면 언어의 오염과 그것이 낳는 사회적 해악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개혁'이란 말을 예로 들어보자. 역대 정권치고 개혁을 부르짖지 않은 정권이 있었던가. 역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살아 남을 수 없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혁은 절대가치인 양 주창되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수구 반동이라는 말로 매도되지만 그 개혁이 정확하게 무엇 하자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개혁이 역사적 변화에 대한 적응이나 정치적 부정부패의 척결을 뜻한다면 그것에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부정에 연루된 사람들이 오히려 부정부패의 척결이라는 원칙론의 주창에는 앞장 설 수도 있을 것이다.
불법정치 자금의 뿌리를 뽑기위한 과감한 노력의 결과, 올해에는 전례없이 돈 안드는 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개혁의 공적으로 꼽힐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개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런 과정에서 '의회 쿠데타'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행한 용어가 터져나온 것은 큰 유감이다.
계속 터져나오는 공적 자금 관련 대형 비리사건 같은 것을 보자. 정치적으로 크게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저질러지는 큰 비리와 부정부패가 국가의 권위를 지키고 국민 전체에게 올바른 심성과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 없이 개혁이라는 구호만으로 뿌리 뽑힐 수 있는가.
개혁의 긍극적 목표가 억눌렸던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데 있다면 그 목표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의견 차이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어떻게'라는 방법론에서일 뿐인데 방법론의 토론도 없이 '진보'니 '보수'니 '수구'니 하는 가치중립적이 아닌 용어들을 사용하여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묵살하는 행위는 언어의 오염을 유발시켜 사회통합을 해치는 대표적 사례이다.
학교간 '서열화'라는 말 또한 정확하고 정직하지 못한 표현의 본보기다.
학교들에 대한 평가나 선호도가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마음속에 형성된다면 그것이 비방의 대상이 될 이유가 있는가. 중국을 포함하여 지금 잘 되고 있는 나라들일수록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엘리트를 배양하는데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선의의 경쟁조차 죄악시하며 사회적 협동을 해치고 갈등을 조장하는 낱말들을 언론매체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전파하고 있다.
정확하지 못한 언어의 사용은 사회통합이 아니라 사회 갈등을 낳는다 는 것을 스스로 지도층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전 주 러시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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