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 대기자의 책과 세상-침묵의 봄

입력 2004-04-24 09:14:02

이번 주간은 새겨 보아야 하는 뜻깊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19일은 4.19혁명 기념일이었고 20일은 곡우이자 장애인의 날. 21일은 과학의 날, 22일은 정보통신의 날에다 지구의 날. 어제(23일)는 세계 책의 날이었고 오늘은 주말, 결혼식이 많아서 우스개 삼아 축의금의 날로 불린다.

그리고 내일(25일)은 법의 날. 어떤 현수막을 보니 이 날은 또 관절염의 날이라나.

이런 날들 덕분에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은 더욱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어저께까지 으스스 겨울 뒤끝인가 싶었는데 난데없이 깜짝 더위가 웃통을 벗어 젖히게 한다.

여름 문턱. 철없는 여름 덕분에 봄은 간데 온데 없다.

오뉴월에 핀다는 모란. 서정시인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린다"고 했지만 요즘 기후를 보면 그럴 필요까지가 없을 것 같다.

등신같이 봄을 기다리다니. 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화사한 꽃들로 치장 몇 번하고는 입을 다물었을 뿐. 봄은 지금 침묵중이다

침묵. 무게 있고 두둑한 느낌의 어휘. 그 속에는 입 다물어 말못할 사정이 철철 넘쳐 나는 것 같다.

영국속담에 "침묵을 지키는 사람과 흐르지 않는 물은 깊고 위험하다"고 했다.

깊다는 말에는 이해가 가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정녕 무엇을 뜻할까. 침묵이라는 말에 묻어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 예를 들면 환자가 피해를 입은 의료사고를 은폐하려는 의사와 간호사의 침묵을 '침묵의 하얀 벽(White Wall of Silence)'이라고 하는 것이나 경찰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를 은폐하려는 그들의 관행을 '침묵의 파란 벽(Blue Wall of Silence)'이라고 할 때의 그런 침묵. 실로 겁나는 침묵들이다.

그렇지만 우리시대에도 가장 잊혀질 수 없는 침묵, 아니 가장 감동적인 침묵이 있다.

미국의 여성환경학자 레이철 카슨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에 나오는 침묵의 의미가 그것. 지난 62년에 출간된 세계적인 스테디 셀러. 국내에서도 몇 권의 번역서들이 나와 환경의 중요성과 오버랩되면서 인기 아닌 인기몰이를 했었다.

특히 중고생들이 읽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상당수는 입시라는 범아구리 때문에 억지로 읽은 학생들이 많지만 그러나 읽고 난 후 많은 학생들이 참 잘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 중 하나다.

젊은층에서도 비교적 필독서라며 서로서로 읽기를 권하기도 하는 책이다.

저자는 허킨스라는 여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 때가 1958년. 그녀의 주위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의 모습이 원인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카슨은 그것이 곧 살충제와 같은 화학물질임을 깨닫고는 이들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는가를 조사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불멸의 책 '침묵의 봄'이다.

철저히 현장을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썼다.

출판 당시의 반향은 대단할 수밖에. 쌀, 햄버거, 달걀 등 각종 먹을거리에 살충제의 이름이 붙는게 유행일 정도였다.

일테면 DDT라이스니 B.H.C.(벤젠헥사클로리드)햄버거 등으로.미국 중부의 이오아마을. 봄에는 푸른 벌판 위로 흰 꽃구름이 떠있고 안개가 희미하게 드리우며 가을 아침이면 언덕 위에는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비옥한 농장에 둘러싸인 마을. 겨울에도 수많은 새들이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풀 씨와 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 날아왔던 마을. 계곡의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웅덩이에는 송어들이 떼지어 놀곤 했던 평화로운 생활을 한지 오랜 마을.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이곳에 스며들어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괴질로 닭들이 죽어 갔고 소와 양들이 병에 걸려 죽었으며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농장의 닭들은 알을 낳았지만 병아리를 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사과나무들은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벌이 없어 수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은 갈색으로 시들어버린 채소들…지붕의 기와 사이와 처마 아래 홈통에는 흰색의 과립형 가루가 몇 무더기씩 보였습니다.

잔디밭, 벌판, 시냇물 곳곳에 눈처럼 뿌려진 가루.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태에 당황하고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에게 모이를 주던 뒤뜰도 황폐해졌습니다…."

책의 첫 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물론 이오아마을은 실재하는 마을은 아니지만 세계 곳곳에는 이런 마을과 비슷한 경험을 한 마을들이 얼마나 많을까. 당시 케네디 대통령도 이 책이 발간된 후 농약의 피해를 조사토록 했고 마침내 발간 10년만에 미국환경청은 DDT의 사용을 금지 시켰다.

이것뿐이랴. 어저께 지낸 지구의 날도 이를 계기로 만들어졌고 결국 리우회담까지 연결된다.

덮쳐 오는 환경재앙. '침묵의 봄'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말라치온, 파라치온, 생식기 이상, 암 발생, 선천성 기형, 면역계 이상 등 무겁고 힘들어 보이는 단어들을 자주 들먹이기 시작했다.

인류가 무차별 뿌려댄 화학물질들. 결국은 인류 그들이 빠지고야 마는 이 모순. 무서운 침묵. 세상 어두운 구석에서는 여전히 침묵하면서 아직도 서서히 온갖 생명에게 생명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침묵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혹시 당신도 지금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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