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건망증'

입력 2004-04-20 09:08:28

1994년말 당시 81세이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나는 이제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라며 자신이 초기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유치원 아이들조차 온갖 스케줄로 바쁘다는 요즘의 라이프 스타일탓일까, 치매는 아니지만 일상적인 건망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중.노년층은 그렇다 치더라도 팔팔한 20.30대까지도 깜빡깜빡 잊어먹는 통에 "치매증세로 인하여…"라는 농담을 자주 던진다.

지금은 병상에 있지만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는 일본의 야구팬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이다.

나가시마 감독은 건망증이 심해 재미난(?) 일화가 많다.

거리에 차를 주차한 뒤 일을 마치고는 차를 버려둔 채 귀가해 경찰이 차를 찾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불펜서 몸 풀던 선수일랑 까맣게 잊고 벤치에 앉아있던 투수를 등판시키기도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시절 함께 놀러갔다 혼자만 귀가한 뒤 아들을 찾아헤맨 얘기는 유명하다.

오는 6월 출범할 제17대 국회는 인적 구성원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전의 어떤 그 국회보다도 흥미로울 성싶다.

자전거로 등원하는 서민형 국회의원도 있을 것 같고, 내로라 식의 권위를 벗어던진 괴짜풍 의원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부 진보 성향의 당선자들은 200가지쯤 되는 것으로 알려진 국회의원의 특혜 울타리를 스스로 상당부분 떼어낼 태세이기도 하다.

사실 국회의원 배지 달고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받는 대우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들 죽자살자 금배지 달려고 애쓰는 모양이다.

하기야 우리네 장삼이사(張三李四)들 역시 '특혜'라는 열매의 달콤한 맛에서 자유롭기가 어렵지만….

그렇지만 세상에는 생사의 기로에서조차 특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1등 객실의 남자승객들에게 우선적으로 구명보트가 배정됐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한 승객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억만장자인 구겐하임, 태프트대통령의 군사고문인 아치볼트 배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아스터 등도 있었다.

선거열전이 막내린 지금 당선자들은 하나같이 가슴벅찬 표정으로 말한다.

"깨끗한 정치를 하겠습니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잘…", "잘…".

지금 그들의 말에는 진정한 국민의 머슴으로 열심히 일하겠노라는 의욕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한국은 곧 부정부패라곤 없는 맑고 밝은 새 나라로 거듭날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상 국회의원들만큼 건망증 심한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아서 그 점이 걱정된다.

이번엔 제발 건망증이 도지지 말아야 할 터인데….

전경옥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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