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아르키메데스, 가우스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알렉산더 포프는 뉴턴에 대해 그의 시에서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야음(夜陰)에 가리어 있더니, 하나님이 '뉴턴이 있으라'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더라"라고 표현했다.
뉴턴은 과학자들 사이에 '신비주의에 대한 이성의 승리' 대변자라고 알려질 만큼 그는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의 수학자이기도 했다.
또 한명의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뉴턴보다 4년 뒤 독일에서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수학, 신학, 철학, 법학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는 미적분학과 이진법의 발견자로 잘 알려졌지만 계산기의 발명가로도 유명하다.
미적분학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독립적으로 발견됐다.
동일한 수학적 아이디어가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동시에 발견된 것. 이런 경우는 각자 그 발견한 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공표하는 즈음에 발생한다.
때문에 '무엇을 언제 누가 발견했느냐'하는 문제가 싸움거리로 등장하기도 한다.
미적분학도 영국은 뉴턴이 독일은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의 불은 라이프니츠가 먼저 1684년에 그의 연구를 발표하면서 "나의 미적분학은 어떤 상상력도 필요없이 일종의 해석학에 의해 진실을 제공한다"라고 쓴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뉴턴의 미적분학의 발견은 라이프니츠보다 앞섰다.
그의 독창적 아이디어가 다양한 형태로 이미 사람들 사이에 돌아 다녔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뉴턴은 라이프니츠의 이 발표를 보고 진작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낙담해 격노했다.
뉴턴의 친구들과 팬들이 이 싸움에 개입해 라이프니츠에게 뉴턴의 아이디어를 담은 문건을 보라고 주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전에 미적분학에 관한 뉴턴의 어느 문건도 본적이 없었다.
뉴턴의 가까운 친구인 뒬리어는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연구의 일부를 표절했다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이런 적대감이 수년간 지속된 후에 라이프니츠는 1711년 영국 왕립협회에 이것이 누구의 업적인지 가려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조차도 그 판결이 라이프니츠가 바랐던 바와 같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자신을 위해 증언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보다 더한 것은 수년간 뉴턴이 이 논쟁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이다.
뉴턴이 왕립협회 원장이었으므로 그는 이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정한 판결 보고서(?)'는 뉴턴에 유리하도록 쓰여졌고, 더욱 재미난 것은 이 보고서가 공개되는 것이 아니므로 대부분 뉴턴 자신에 의하여 쓰여 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뉴턴은 이 판결 보고서의 요약문을 'Philosophical Transaction'이란 잡지에 익명으로 발표함과 동시에 유럽 대륙 사람들이 보도록 라틴어로 번역해 다른 잡지에도 실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들 두 사람의 연구가 통합되고, 세련되기는커녕 미적분학의 연구는 두 동강이 나기에 이른다.
영국인들은 뉴턴 버전에 호의적이었고 대륙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것이 표현방식을 포함한 몇 가지 국면에서 유리하다고 하여 이에 호의를 가졌다.
이 같은 분열은 1세기 이상 계속되어 이 분야를 연구하는 영국 수학자들의 유럽대륙 진출을 막기도 하였지만 미적분학은 둘 중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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