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이공계 추락과 인문학

입력 2004-03-26 09:36:45

'직각 삼각형에서 빗변의 길이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

저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의 직업은? 당연히 수학자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정수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가정 위에 세워졌다.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과거 유명한 수학자나 자연과학자들은 대부분 철학에 자신의 학문 원류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과학을 하면서도 항상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근본적인 고뇌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이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에서 공천을 확정지은 총선 후보들의 직업을 분류한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후보 가운데 직업 정치인이 가장 많았고 법조인 출신이 다음을 차지했다.

두 직업군이 전체 후보의 56.1%나 됐다.

꼴찌는 과학.기술인 출신으로 600여명 가운데 2명에 불과했다.

과학.기술인 소외 이유에 대해선 주장이 분분하다.

정치.사회.역사적 배경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기자로서는 무엇보다 이공계 특유의 학문적 소극성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교양에 소홀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요즘 같은 취업 제일주의 시대엔 학점 취득 목적이 아닌 한 교양 과목 수강이 논의되기도 힘들다.

그러나 인문계열 학생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 자연계열 학생들의 인문과학에 대한 무지는 국가의 미래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자연과학도의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소극성은 걱정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 배경에 '과학.기술인은 정치나 경제 놀음에 휘말려선 안 된다'는 지배층의 통제 논리가 개입됐을 것이란 의심에 생각이 미치면 소름이 끼친다.

철학 없는 과학, 의식 없는 기술은 그 자체로 원자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계열 고교생들이 우리말과 사회과목을 전혀 배우지 않아도 되는 입시제도가 올해부터 시행된다.

정부는 고작 이공계 기피를 막기 위해 장학금 확대, 연구직 우대 등 미봉책만 내놓고 있다.

피타고라스가 멀리 있다면 IT 성공신화를 이룬 빌 게이츠나 안철수씨를 보자. 그들은 컴퓨터와 의학에서 출발했지만 경영학을 배웠고 사회 현상을 짚어간다.

지식사회에서의 성공에는 학문의 심화도 중요하지만 복합화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도 역시 몇 명의 과학.기술인 출신 국회의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비례대표로 마지못해 내준 자리일 것이다.

이공계 스스로 학문적 소극성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이런 현실은 되풀이된다.

이공계 추락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자연계열 고교생들도 절름발이인 채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미래를 곰곰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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