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굵어졌다 잦아들었다 했다.
살을 에는 찬바람에도 가끔 구름을 헤집고 햇빛이 내리쬐기도 했다.
산아래 남쪽 도로 건너에는 섬진강(蟾津江)이 S자 모양을 그리며 유유히 흘렀고, 하얀 모래밭은 겨울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다.
경남 하동군 고소산성(姑蘇山城;300m).
진주에서 2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50분쯤 달리자 하동읍을 지나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도착했다.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다.
모방송사가 한창 대하드라마 '토지'를 촬영하고 있는 평사리 '상평마을' 최참판 댁을 비껴 승용차로 능선을 5분쯤 오르자 너무도 한산한 '한산사'가 취재진을 맞았다.
절터 울타리에는 녹은 눈이 얼어붙어 생긴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기서 다시 손으로 땅바닥을 짚다시피 가파른 산 고개를 800m쯤 오르자 고소산성의 자태가 드러났다.
대가야와 백제의 백성들이 무거운 돌과 흙을 나르며 오르내렸을 험한 산길이었다.
지리산 신선봉(神仙峯;615m)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의 서쪽 골짜기를 마름모꼴로 둘러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둘레 436m, 높이 5.5m, 평균 폭 5m. 능선을 올라 맞닿는 남동쪽 성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굽은 흐름과 '악양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벽 위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소나무 한 그루가 질긴 생명력과 세월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남동쪽 출입문에서 북쪽으로 30m쯤 떨어진 곳에는 돌로 쌓아 만든 집수지(集水池)가 그대로 드러났고, 다시 50m쯤 오르자 대나무가 빼곡이 둘러싼 건물 터가 나타났다.
성의 북동쪽에도 출입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 성터에서는 백제토기와 신라후기 양식의 토기만 확인되고, 대가야 유물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500년대 백제의 섬진강 진출에 대항해 대가야가 쌓았던 유력한 산성의 후보지로 꼽히지만, 아직 그 실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고소산성 표지판에도 '유물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대가야의 성으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적고 있다
고소산성을 배경으로 한 2월 하동의 강산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지만, 1천500년 전 대가야와 백제는 뺏고 뺏기는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일본서기(720년 펴냄)에는 514년 대가야가 대사(帶沙:하동)에 성을 쌓아 백제와 왜에 대비했고, 515년에는 대사강(섬진강 하류)에서 백제 사신을 호위하던 왜 군대를 공격해 쫓아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한다사(韓多沙)', '동국여지승람'에 '다사군(多沙郡)'으로 표기된 지역은 바로 하동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사'와 '다사'는 하동지역으로 추정된다
고소산성은 바로 대가야가 백제에 대응해 대사에 쌓았다는 그 성일 가능성이 높다.
섬진강 하구를 장악하지 못하면, 백제든 대가야든 왜(倭)와의 교역 주도권을 상대국에 넘겨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섬진강의 발원지는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 산 계곡을 타고 내린 이 강은 임실군 갈담 저수지를 거쳐 오수면을 관통한 오수천(獒樹川)과 역시 임실을 거쳐 내려온 적성강(赤城江)을 순창군에서 한데 모은다.
이후 곡성군 북쪽에서 남원시를 비스듬히 관통하는 요천(蓼川)을 합쳐 남동으로 흘러내리다 곡성군 오곡면 압록에서 보성강(寶城江)과 합류한 뒤 지리산 협곡을 에둘러 남쪽으로 굽이친다.
구례군을 통과한 섬진강은 경남 하동군과 전남 광양시를 가르며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남쪽 바다에 몸을 던진다.
400년대 후반, 대가야가 중국과 왜로 향하는 바닷길을 뚫기 위해 확보한 루트는 바로 장수-임실-순창-곡성-구례-하동으로 점쳐진다.
그 교통로를 따라 대가야의 무덤과 유물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하동 고소산성 앞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전남 구례군에 닿는다.
구례군을 가로지르는 섬진강 북쪽 연안에 접한 토지면 용두리. 20여 가구가 모인 '용두 마을' 남북으로는 각각 18번 국도와 섬진강이 평행선을 달리고, 강 건너에는 오봉산과 객산이 우뚝 서 있다.
'용두리 고분군'은 이 마을을 둘러싼 소나무 군락지와 과수원, 채소밭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개간 과정에서 가야계통의 토기들이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파헤쳐지기 전에 묻힌 역사를 발굴해야 할 시점이다.
이 동네 김영훈(75)씨는 "70년대 말 객토를 하면서 가마터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했고, 숯도 두 자루 가량 걷어냈다"며 그 곳에서 나온 토기들을 내보였다.
구례군 향토사학가 문승이(81)씨는 "구례군에서 나온 가야계통 토기는 김씨를 비롯해 우종수씨와 5, 6년전 작고한 유봉춘씨 등 주민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씨 등에 따르면 용두리 고분군에서는 목긴 항아리(長頸壺)와 목짧은 항아리(短頸壺), 뚜껑있는 굽다리 항아리(有蓋 臺附壺), 굽다리 접시(高杯), 바리모양 그릇받침(鉢形器臺) 등이 나왔다.
인근 광의면 대산리에서는 손잡이 있는 잔(把手附杯)도 채집됐다.
이중 마름모꼴로 창을 낸 굽다리 접시는 300년대 후반 아라가야(함안) 양식, 삼각형 창을 낸 굽다리 접시와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400년대 전반 소가야(고성) 양식, 목긴 항아리는 500년대 초 대가야 양식이다.
이는 아라가야-소가야-대가야 양식으로 바뀌는 경남 서남부 지역 가야토기의 분포흐름과 일치해 눈길을 끈다
용두리 고분군을 조사한 나주 동신대 문화박물관 박철원 학예연구사는 "섬진강 연안의 구례 지역은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제국의 진출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구례를 관통하는 섬진강 유역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라가야와 소가야 세력이 한 때 진출했고, 4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백제가 진출한 500년대 중반 이전까지 대가야권역에 속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구례 용두리 고분군과 하동 고소산성을 뒤로 한 채 취재진은 이제 남쪽 바닷가로 향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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