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은 태아의 배꼽과 태반을 잇는 생명줄이다.
최근들어서 미래의 난치병에 대한 치료제로 각광 받으면서 탯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탯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조상들은 장손이나 귀한 자손들이 태어나면 탯줄을 태워 남은 재를 단지나 옹기에 담아서 보관을 했다 훗날 탯줄의 주인공이 죽으면 관속에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런 우리의 전통 '배꼽문화'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게 한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지를 찾아 선조들의 생명사상을 느껴보자.
◇왕족의 태실
궁궐에서는 왕족이 태어나면 태를 태우지 않고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모셨다.
만일 태실에 있던 태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태봉(胎封)이라 하여 또 다른 '왕릉'을 만들었다.
왕릉은 왕궁에서 100리 안에 써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으나 태실만큼은 거리 제한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멀더라도 명당을 찾아 태실을 삼았다.
태실의 사방 500m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금표를 세워 관상감이란 관청에서 태의 호송과 태실을 감독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나 일제시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거두어 들여 경기도 고양시 조선 왕족의 무덤이 모여있는 서오릉 인근의 서삼릉에 모아두었다.
이후 일본식 담장과 문으로 봉쇄 한 후에 태실을 표시하는 비석들을 일본을 뜻하는 日(일)자로 배치했다고 한다.
◇세종대왕 태실
경북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조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19기(전열 11기, 후열 8기)가 모셔져 있다.
태실 앞에는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 각각 왕자의 태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세종 20년(1438)에서부터 세종 2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세종20년(1438년)에서 세종 24년까지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왕손 단종 등 20여기의 태실이 안치되었는데 세조가 단종의 왕위찬탈이 있은 뒤인 1457년(세조3년) 단종복위에 연류된 금성대군 등 다수의 태석과 태비는 산아래로 파헤쳐 굴러지고 말았다.
화강암으로 깎은 19기의 태실은 조선 태실의 전형적인 사각 궤 형식으로 땅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를 만들어 태를 보관했다.
백자 속에는 테의 주인 이름 과 생년월일이 있고 땅 위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로 만들어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현재는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 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의 석물이 산자락에 모여져 있다.
현재 출토 유물은 경북대 박물관에 분청인화문 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 뚜껑 1벌과 이름이 기록된 지석 2점이 소장되어 있고 그 밖의 것은 1929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모두 옮겼다.
왜관읍에서 왜관대교를 지나 구미로 가는 4번 국도를 타고 가다 905번 도로로 좌회전해서 칠곡군 경계를 지나면 태실을 찾을 수 있다.
자세한 약도는 성주군청(www.seongju.go.kr)홈페이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김경호(체험교육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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