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즉위에 대한 시비
광해군은 1609년 2월 왕위에 올랐는데, 명나라는 그해 6월 요동도사(遼東都司) 엄일괴(嚴一魁)를 사신으로 보내 그 즉위가 타당한지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형 임해군의 생존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임진왜란 참전으로 커진 영향력을 국왕 즉위문제에까지 행사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엄일괴가 국왕과 임해군을 대질시키겠다고까지 주장하자 분개한 대사헌 정인홍은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서 보여주자고 주창했으나 결국 엄일괴는 서강(西江)에서 임해군을 만났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임해가…일부러 병으로 미친 체하면서 차관(差官:엄일괴)을 보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로써 소동은 끝났지만 그 배경에는 막대한 은이 뇌물로 사용되었다.
이후 명나라 사신들은 막대한 은을 챙겨갔다.
광해군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했던 유용(劉用)은 6만냥의 은을 챙겼고, 세자 책봉례를 주관했던 염등(苒登)은 '호조에서 1년 동안 모은 은을 열흘만에' 챙겨 돌아갔다.
심지어 광해군 14년(1622) 후금 공격을 위한 원병 요청을 하러 온 양지원(梁之垣)까지 수만 냥을 뜯어갈 정도였다.
이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명의 파병요청과 조선 지배층
그 사이 만주의 여진족들은 누루하치(努兒哈赤:청 태조)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1588년경 건주 여진을 대부분 통일한 누루하치는 선조 25년(1592)과 31년(1598)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는 조선측의 거부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누루하치는 1618년(광해군 10) 4월 명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원한'을 내세우며 요충지역인 무순(撫順)을 함락시킴으로써 명나라에 정면도전했다.
명청교체의 서막이었다.
이에 분개한 명나라는 정벌군을 조직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파병에 반대했으나 서인과 남인은 물론 대북의 이이첨까지 향명대의(向明大義)에 따른 원병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고, 소북의 박승종.임연과 서인 윤휘, 남인 황중윤 등 극소수만이 광해군을 지지했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여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광해군에게 중요한 것은 원병 파견이 아니라 정보 수집과 국방력 강화였다.
그는 여진어 역관 하세국(河世國) 등을 보내 정보를 수집했으며 화기도감(火器都監)을 다그쳐 조총과 화포를 개량하게 했다.
광해군 4년 호서(湖西)의 조천종(曺天宗)이 만든 파진포(破陣砲)는 이렇게 만들어진 신무기였다.
'파진포를 쏘아 보니, 아륜철(牙輪鐵)이 돌과 서로 마찰하면서 금세 저절로 불이 일어나 철포가 조각이 나고 연기와 화염이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불덩이가 땅 위에 닿으면서 절반쯤 산을 불태웠습니다.
만일 적이 오는 길에 다수를 묻어 둔다면 승패의 변수에 크게 유익하겠습니다.
… 비록 수천 명의 군사일지라도 한 발의 포탄이면 소탕할 수 있으니, 싸움터의 무기로는 이보다 교묘한 것이 없습니다("광해군일기" 4년 11월 12일)'
그러나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명나라의 거듭된 요청과 '재조지은(再造之恩: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준 것)'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 지배층의 요구에 밀려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조명군 1만여명은 광해군 11년(1619) 2월 압록강을 건넜는데, 여기에는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5천여명의 조총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조총수의 분전으로 승리했으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했다.
버드나무에 의지해 싸우다 전사해 '의류장군(依柳將軍)'이라고 불렸던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를 비롯해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을 비롯해 수천 명의 장졸이 전사했다.
그것도 명 장수 두송(杜松)이 공명심으로 약속을 어기고 먼저 진군하는 바람에 당한 참패였다.
*후금과 화의를 맺은 이유
이때 강홍립이 항복함으로써 나머지 장졸의 목숨을 건졌지만 이후 극심한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서인들이 작성한 "광해군일기"의 사관(史官)은 항복이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시장 장사꾼 호족(胡族)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장사꾼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역관 하서국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奴酋:후금 국왕)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2일)'
그러나 평안감사 박엽(朴燁)은 "적이 먼저 하서국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했다("광해군일기" 11년 3월 12일)"고 후금에서 먼저 청했다고 전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광해군이 일개 시장 장사꾼에게 중대한 국사를 먼저 통보했다는 주장은 의심스럽지만 서인들은 강홍립의 항복을 광해군의 뜻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전사한 김응하 추모문집인 "충렬록(忠烈錄)"를 편찬하는 등 대대적인 전사자 추모사업을 벌여 자신에게 쏠리는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
그러면서 명의 재파병 요청은 끝내 거부했다.
대신 평안도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오히려 명나라를 돕는 길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런 일을 겪으면서 광해군은 대외인식에 별차이가 없는 북인들만으로 정권을 꾸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재위 14년(1622) 무렵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쫓겨난 이정구.이귀.최명길.이서.남이공.이수광.정경세 등의 서.남인들을 다시 등용했다.
그러나 광해군 12년(1620)부터 쿠데타를 준비한 서인들에게 이런 화해조치는 쿠데타의 호기일 뿐이었다.
사실 인조반정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쿠데타였다.
광해군 14년(1622) 12월부터 조정에서는 이귀와 김자점을 역모로 처벌하라는 주장이 빗발쳤던 것이다.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가 합계하기를 '이귀가 그의 인척(姻戚)인 김자점과 함께 서궁(西宮:인목대비)을 부호한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말들이 자자합니다.
… 이귀.김자점을 잡아다가 가두고 끝까지 추궁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소서 ("광해군일기" 14년 12월 24일)'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당파싸움으로 치부했고, 쿠데타 당일(재위 15년 3월 12일) 이이반(李而頒)이 '오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변(上變)했음에도 무시했다.
유희분.박승종 등이 두세 번 조치를 취하라고 청하자 병조판서, 입직당상, 네 포도대장, 훈련 도감 대장을 비밀리에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연서역에 모여있던 반군이 창의문을 지나 창덕궁 문 밖에 이르자 궁성의 호위를 맡은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지팡이를 버리고 맞이했으며 천총 이확(李廓)은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다급해진 광해군은 젊은 내시의 등에 업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 도망갔다가 체포됨으로써 쿠데타는 반정으로 변모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출교지는 쿠데타 세력들의 대외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이렇게 즉위한 인조정권이 숭명반청(崇明反淸)의 기치를 드높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뜨는 청나라를 반대하고 지는 명나라를 숭상했던 이 정책의 결과는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과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이었다.
현실을 무시한 외교정책으로 국토는 또다시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50여년 후인 지금. 광해군 때처럼 외교문제는 극심한 국론분열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핵심은 단연 미국과 북한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어디가 명나라이고, 어디가 청나라인가. 현재의 정부와 야당 중 어느쪽이 광해군이고 어느쪽이 인조인가. 아마 서로가 자신은 광해군이고 상대방을 인조라고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광해군인지 인조인지의 기준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외교는 내치의 연장이란 말처럼 국내 정치의 반영이다.
우리는 동맹을 선택할 것인가 자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중간지대를 선택할 것인가.
역사평론가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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