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핀란드와 폴란드는 양쪽이 다 러시아의 속국이었다.
17세기까지 동유럽의 최대강국임을 자랑하던 폴란드는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있던 귀족 가문들간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국세가 쇠퇴하면서 18세기 말에는 드디어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으로 분할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그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러시아는 러시아영 폴란드를 폴란드 왕국으로 재구성하여 기본법을 제정해 주는 등 정작 러시아 신민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정치적 대접을 함으로써 폴란드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해 항상 우월감을 갖고 살아왔던 폴란드인들이 그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1830년 폴란드는 완전독립을 목적으로 무력봉기를 감행했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당해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고 기본법은 보다 까다로운 조직법으로 대치되었다.
민족적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33년 후 다시 무장봉기를 한 결과는 폴란드라는 이름이 아예 지도에서 사라지고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제국내 비슬라 지역의 주민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핀란드는 1809년 러시아의 손으로 넘어올 때까지는 언어와 종족을 달리하는 스웨덴인들의 나라 스웨덴에 속하는 한 변경 지역일 뿐이었다.
스웨덴식 지방자치 제도를 향유하고 있었지만 항상 2등 국민 취급을 받던 그들은 자기들의 땅이 러시아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선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해 나오는 기회로 활용하고 새 주인이 된 러시아제국의 그늘에서 조용히 살며 독립국 국민이 되기 위한 실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정열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핀란드인들이 독립을 향해 선택한 길은 낭만적인 폴란드인들의 방법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핀란드인들은 우선 러시아 황제가 환심을 사기 위해 세워준 알렉산더 대학, 지금의 헬싱키 대학교를 민족정신 함양의 중추로 가꾸는데 전력을 다했다.
러시아 황제의 이름을 딴 대학이지만 비 핀란드인은 한사람도 교수로 받지 않을 것을 교수회가 고집함으로써 설립 20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황제가 추천한 한 러시아인 교수를 채용시키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고집을 부리면서도 핀란드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다소곳했기 때문에 황제는 핀란드인들을 러시아인들보다 신뢰했고 핀란드 국가 원수(元帥)겸 대통령을 지냈고 오늘날도 국부로 존경받는 만네하임은 니콜라스 2세의 근위대 출신이었다.
핀란드인들은 우선 핀란드어를 스웨덴어처럼 핀란드의 공식언어로 인정받는데 성공했고 "칼레발라"라는 이름으로 민족 전설을 수집하여 "시수"라는 핀란드인 특유의 불굴의 정신을 함양했으며, 시벨리우스로 상징되는 민족음악, 갈렌 칼렐라로 대표되는 민족 미술을 만들어냈다.
러시아제국에 편입되어 있는 중에도 핀란드 자치의회는 이미 1906년에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함께 허용하여 국회의원 10분의 1을 여성으로 채웠다.
1917년 러시아가 두 차례의 혁명으로 크게 흔들리는 틈을 타 재빨리 독립을 선포했을 때 핀란드는 이미 독립이라는 이름의 상자 외곽만 없었지 상자속에 채울 내용물은 가득히 준비된 상태였다.
핀란드가 오늘날 세계 일등국으로 부상한 비밀이 무엇인지 알 만한 일이다.
요즈음 자주외교니 자주국방이니 하는 말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서 핀란드와 폴란드의 역사를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폴란드처럼 과거의 영광이라는 망령에 시달릴 필요도 없건만 왜들 그처럼 호들갑을 떠는지 속셈을 알 수 없다.
자주를 외치지 않는다고 남에 의존해서 살기 위해 국방을 하고 나보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외교를 하는 나라가 세상에 있는가. 개인적 인간관계에서는 싫은 사람을 피하고 살 수 있지만 사회관계에서는 그것이 불행히도 허용 안된다.
하물며 국가관계에서 그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싫고 두려운 나라일수록 좋은 관계를 운영해 나가려 애쓰며 동맹관계에서는 조금이라도 힘이 우세한 쪽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우리에겐 지금 오기를 부릴 여유가 없다.
좋던 싫던 외국이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며 우리와 동맹관계를 맺고 우호적으로 지내온 미국에게 적대감을 표시하여 내쫓는 것이 우리국민에게 어떻게 이득이 된다는 것인지 이 나라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젊고 늙은 위대한 분들에게 묻고 싶다.
이인호(서울대 명예교수.전 주 러시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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