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권기철(41)은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소리를 그리는 화가다.
열정적인 헤비메탈을,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을 화폭에 담는다.
지난 98년 이후 수십 차례 열린 대구시립교향악단(시향) 연주회의 팸플릿과 포스터를 도맡아 그리고 있다.
그는 "대학졸업 이후 17년 동안 웬만한 연주회는 빠지지 않고 보러 갔다"며 "좋아하는 연주자가 있으면 서울이든 부산이든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리를 잘 느끼기 위해 관람석도 까다롭게 고른다.
대구문예회관에는 늘 앉는 고정자리가 있고, 어떤 연주회든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2층을 선호한다.
권혁문 대구시립교향악단 단무장은 "권씨는 그림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하고 잘 알기 때문에 팸플릿 디자인이나 구성 등을 모두 맡긴다"며 "연간 열 다섯 차례 가량 열리는 연주회 포스터 등을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려줄 만큼 음악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열 네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영주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진학한 뒤 가족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출, 모 신문지국의 허름한 옥탑방에 홀로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는 아침에는 신문배달, 낮에는 학교, 오후에는 수금하러 발품을 팔았다.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다.
뜻도 잘 모르면서 팝송에 빠지게 된 것이 음악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림과의 만남은 그 이전부터였다.
다섯 살 때, 그는 작두에 오른 손이 절반 가량 잘렸다.
봉합 수술은 했지만, 유년의 그에겐 커다란 상처였다.
동시에 붓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쏟게 된 계기도 됐다.
대학 졸업 이후 클래식 음악에 빠지면 빠질수록 '소리'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간혹 격정적일 때는 클래식보다 헤비메탈의 음률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무형'의 소리를 붓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씨의 그림은 붓을 처음 든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를 한 듯 칙칙한 바탕에 가로로 세로로 먹물이 오가고, 때론 굵은 붓 선이 무질서하게 흘러 다닌다.
대체로 그 바탕은 어둡다.
혹 그림 한 귀퉁이나 바탕 속에 흐릿하게나마 트럼펫이나 색소폰, 바이올린이 엿보여 대상물을 짐작케 한다.
간혹 그림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관객을 만날 때면 권씨는 당혹스럽다.
그리고, 부끄러우면서도 즐겁다.
권씨는 "내 그림을 정확하게 꿰뚫어 내는 사람이 나타날 때는 벌거벗은 몸을 들킨 듯 부끄럽다"며 "한편으로 내 미술세계를 이해한다는 면에서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팝송 음반과 90년대 초반 그렸던 그림을 하나씩 버리고 있다.
대구교육청 맞은편 그의 작업실 한 켠에는 내다버릴 음반과 그림이 가득 쌓여 있다.
클래식에 심취하면서 팝송의 기억을 지우고, 비구상 작품에 매달리면서 어설픈 자신의 구상 작품을 떨쳐내기 위해서다.
삶의 역경을 온 몸으로 부닥쳐온, 소리를 그리는 화가는 오늘도 변신과 더 나은 예술세계를 꿈꾸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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