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산불감시초소를 내려와서 능선을 따라 계속 북상하다가 가파른 산을 숨을 헐떡이며 낑낑 올라가자 새벽 6시 18분. 마침내 이번 산행의 두번째 높은 봉우리인 봉황산 (740미터)에 도착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우람한 산의 실루엣이 고즈녁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낮에 보면 북쪽으로는 견훤산(746미터)이, 남서쪽으로 천택산(683미터)이, 서쪽으로는 구병산(876미터)이 웅장하게 휘둘러 있다고 한다.
봉황산. 이름도 거창하네. 우리나라에 봉황산으로 붙여진 이름은 여러 곳에 있더라구요. 이름이 너무 거창해서 그런가. 다음 산행지인 속리산의 정상도 천황봉인데. 이 동네는 아예 봉황만 노는 구만. 잡새는 얼씬도 못하겠네. 이름 거창한 산 치고 괜찮은 산 없다고.
사실 산하면 '곤륜산'과 '수미산'이죠. 중국 사마천의 사기, '우본기'에 보면. "황하는 곤륜산에서 시작한다. 곤륜산은 높이 2천 5백여리로 일월이 서로 피하고 숨어서 각자의 광명을 내뿜으며 주야를 가르는 산이다. 그 정상에서는 예천과 요지가 있다"고 쓰고 있다. 해와 달이 서로 피하며 주야를 가른다. 참 멋진 말이지만 뻥이 세구만. 이헌태의 판단, 해는 아부지이고 달은 오마니같아요. 뚱딴지같이.
불교에서 넓은 바다, 세계 중심이 바로 수미산.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성철 스님이 입적하실때도 수미산이 등장하죠.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난다 /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도다 / 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다"
제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성철 스님 어록 가운데는 기가 막힌 게 많더라구요. 1986년 새해법어. "노장과 공자가 손을 잡고 석가와 예수가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 악마가 사라지고 천당 지옥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 희다 시비싸움이 꿈속입니다"
또 한 때, 사월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어를 통해, "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만물이 부처라는 생각, 좋습니다 좋고요.
보너스. "성현과 달사(達士)들이 나 잘났다고 서로 뽐내니 현미경속의 티끌만한 그림자", "대중이여 석가 오심도 망상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오심도 망상이요, 천칠백 공안도 망상이니—절경(絶景)이 어떠한가" ,"부처님 법문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말과 문자를 쫓지 말고 저 달을 바라봐야 한다" 맞습니다, 맞고요.
새벽 7시가 되니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천지가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동쪽에서 벌건 기운무리가 흰 구름과 수평으로 뒤섞여 탄성을 자아내는 예술품을 창조해 내고 있다. 동쪽편 높은 산맥에 가로 막혀 정작, 장엄한 일출의 모습은 내내 볼 수 없었다. 이번 산행에서는 '일출 꽝'. 나한테는 보여주지 않아도 해는 당연 뜨고 있겠지. 해 입장에서 보면 이헌태는 티끌 같은 존재.
햇빛이 만물의 물상을 비추는 아침이 되자 백두대간과 주변의 풍광이 오롯이 드러났다. 와, 사방이 천층만겹의 준령들도 기품이 넘쳐 난다. 우락부락, 거칠고 늠름한 남성적 산악지대, 첩첩산중 그 한 가운데에 선 것이다. 경북 상주를 가로 지르는 밋밋한 야산 산행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아예 잊었던 백두대간의 진면목이다. 와, 반갑다. 실제, 상주 야산이 너무 지겨웠죠. 백두대간도 다 같은 백두대간이 아니더라구요. 상주 야산 같은 그런 구간도 있어야 이 같은 구간도 빛을 보죠.
새벽 7시 30분쯤, 까막득 아래, 갈령과 비재가 보이는 능선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아침식사를 했다. 따뜻한 라면국물에 김밥과 김치. 만나는 식사. 좋은 식사는 좋은 반찬이 아니라 좋은 환경과 좋은 기분이 만든다. 이번에는 라면에 오뎅도 넣었고 숭늉도 만들어 먹었다.
인스턴트 누룽지가 거의 다 중국산 이라면서. 와, 한국의 간판 음식인 누룽지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 한국의 혼까지 중국의 '싸구려 유령'에 넘어가다니. 뭐, 그렇게까지 의미를 세게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요. 알겠습니다. 세계에서 누룽지 먹는 民族 더 아시면 연락주세요. 그만큼 누룽지하면 한민족, 한민족하면 누룽지죠. 주룽지는 전 중국 총리 이름인데. 은퇴한 주룽지를 수입해야 하는데. 능력도 뛰어난데다 청백리의 표상이었다고 하네요.
능선 끝자락 바위위에 서서 혼자 주위를 살펴보며 감상에 젖는다. 오른쪽 건너편에는 바위로 뒤덮힌 견훤산이 호령하는 장군처럼 우뚝 솟아있고 앞쪽에는 일행이 힘차게 나아가야할 형제봉이 아득히 빨리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견훤산과 형제봉을 동시에 보니 감회가 새롭다. 견훤이라, 형제라.
전주시청에 가면 로비에는 견훤홍보공간이 있더라구요. 견훤은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고 무예도 출중하게 뛰어난 장군으로 후백제를 세우고 전주에 그 수도를 정했다며 자랑스런 인물로 소개했더라구요. 그 분이 이 상주에서 태어났죠. '태조왕건' 방송드라마를 통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다스린 사벌성이 상주인 거 다 아시죠. 영웅도 전쟁에서 지면 역적이 되는 것이죠. 견훤이 딱 그 꼴이죠.
그런데 견훤이 아들한테 감금 당하고 열 받아서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고 아들을 죽여 내 원수를 갚아달라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죽여달라고 적에게 간다는 게 우리로서는 믿기지 않죠. 사실, 쪽 팔리는 일이죠. 그러나 역사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니 겁도 났을 거에요. 살고 봐야지, 아들이 무슨 소용.
당태종 이세민. 큰형인 황세자 이건성과 둘째형 이원길을 죽이고 그 일족은 간난아이까지 남김없이 참살하고 아버지 고조 이연을 감금했죠. 이름하여 '현무문의 정변' 시쳇말로 '금수같은 놈'이죠. 아이러니 하게도 이 분이 '정관의 치'로 당나라 태평성대를 열었고 또 그 유명한 만고의 통치술 '정관정요'를 펴낸 장본인이죠.
당 태종이 '정관정요'에서 변명을 풀었더라구요. "요임과 순임금은 아들이 있었지만 자기아들을 폐하고 천하의 지위를 주지 않았고 관숙과 채숙은 주공의 형제들이지만 주공은 주왕실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 그 두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공자가 자나 깨나 존경했던 주공. 그렇게까지야. 아 슬프다.
하여튼 당태종의 '잔혹가족살륙'과 '전무후무 태평성대'. 극과 극, 어울리세요. 이에 대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 2000년간 동,서양을 막론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는 징키즈칸도 잔혹했고 중국을 최초로 천하통일한 진시황도 잔혹했고 명나라 창업 주원장도 잔혹했고. 대제국을 사람들이 거의 잔혹했구만. 잔혹하지 않으면 대제국 건설 못하나. 죽으면 염라대왕이 어떤 판결을 내릴까 무척 궁금하다.
민주주의가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제국이 피를 필요로 하는 구나. 조선시대 '여인잔혹사' 영화가 나오더니 '말죽거리잔혹사'라는 영화가 또 나왔더라구요. '대제국 잔혹사' 영화도 나올 때가 되었는데.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 아버지와 원수가 되고 형제들을 도륙했죠. 사돈 즉, 세종대왕의 처 일족을 싸그리 처형했죠. 참 이상하네. 싹 쓸어버리니 다음 왕때는 태평성대가 오네. 당 태종과 조선 태종도 이름도 같고 역할도 비슷했네. 모르겠다.
견훤산과 형제봉을 보면서 부자관계와 형제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네요. 저희들 같은 범인이야 서로 죽이고 죽여할 필요가 없죠. 돈 많은 부자들은 돈을 놓고 형제간끼리 싸운다고 하더라구요. 저희들은 물려받은 돈이 없어서. 부모님 고맙습니다. 싸우지 않게 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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