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태의 백두대간 종주기 (25)-형제봉 (1)

입력 2004-01-06 15:29:01

1.

2003년 12월 28일(토), 백두대간 종주를 향한 19번째 산행에 나섰다. 이날 따라 2003년을 착 붙인 이유가 있다. 다 아시죠. 곧 해가 바뀌면서 2004년이 되기때문이다. 올해 백두대간 '마지막 산행'인데다 기미년 한 해를 기념하는 '망년 산행'인 것이다. 2004년 내년은 갑신년이니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에서 '갑신정변'으로 넘어가네.

'망년회'. 뚜벅 뚜벅 걸어온 지난 한 해의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일을 말끔히 잊자는 행사. 한국의 망년회, 이거 문제 많죠. 한국의 망년회는 딱 깨놓고 거의 날마다 흥청망청 술 마시는 '술년회' 죠. 우째 이 지경까지 왔는지. 12월 한달 내내 망년회에 참석하다 가는 몸 버리고 돈 깨지고. 망년회의 '망'자가 망하다, 노망하다, 망령되다는 뜻이 되겠구만. 심하면 술로 사망할 수도 있고요.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가 아니고 이제는 행동할 때가 되었다. '망년회폐지 범국민추진운동본부'.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니 다른 나라에 알아보든지 아니면 한국을 떠나는 게 좋다고요. 그건 안되지. 끝까지 한국에 남아 용케도 살아야지. 한국인으로서 삶을 끌고 가면서, '끝까지', '용케도' 가 던지는 의미가 자못 크네.

12월 연말이 되면 개인 캘런더에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잖아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학교동창회는 우째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회사, 사회 친구등등. 한 해를 잊는 달이 아니고 한 해의 일들이 12월에 몰쳐 있는 달 같아요. '한국의 망년회는 지연,학연 (혈연까지는 아니고)공화국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죠. 그러면 한국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만드는 지연,학연,혈연사회를 붕괴시키려면 망년회를 폐지하면 되겠네. 연말에 망년회하면 징역1년. 만약 그런 법이 제정되면 한국사람들이 11월로 망년회를 바꿀 걸. 이헌태, 너 뭐야.

이헌태의 영웅,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서 한 수 배웁시다. 정 선생이. 뭐야. 고쳐서 그 분. 그분이 모임의 이름과 규약을 기록한 '죽란시서첩'을 보면 풍류와 낭만이 풍겨 나죠.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번 보이고 서늘한 초가을 연꽃이 구경할 만하면 한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번 모이고 겨울이 되어 큰 눈이 내리는 날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번 모이기로 한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셔가며 시가를 읋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이 어린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주선토록 하여 차례대로 나이 많은 사람까지 한 바뀌 돌고 나면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게 한다"

야, 멋있다. 다산 정약용. 학교 근처라도 나온 사람이면 이렇게 살아야지. 12월 첫째 화요일이 어떻고, 매달 둘째주 수요일이 어떻고, 무조건 12월 15일이 어떻고. 이게 무슨 낭만이 있습니까. 한국인이여, 이제 여유를 갖고 낭만적으로 삽시다. 낭만적으로 산다고 돈 드는 것 아닙니다.

하기사 정선생이 살던 이조말쯤만 해도, 또 정선생이네. 이헌태, 조상님 알기를 우습게 알구만. 그게 아니고요. 그분이 사시는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시테크', 더 나아가 '초테크'라는 개념이 없었죠. 수백리 멀리 떨어진 친구집에 가서도 일주일 이든 한달이든 푹 눌러 앉아서 술도 마시고 시도 짓는 풍류의 시절이었으니까. 쉽게 얘기해서 '세월이 뭐 먹나' 하며 쭉 늘어졌던 팔자 좋은 시절이었지. 놈팽이. '월테크', '년테크' 더 노골적으로 '무테크'개념이었지 뭐.

참고로 인디언들은 12월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고 하네요. 새겨 들을 말한 대목이 있더라구요. 다른 세상의 달 (체로키족), 침묵하는 달 (크리크족),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수우족), 무소유의 달 (퐁카족), 큰 곰의 달(위네바고족), 늑대가 달리는 달 (샤이엔 족). 인디언들을 모두 대한민국 '명예 철학박사'로 임명합니다.

12월을 잘 정리해서 노래한 국내시인. 둥둥둥, 천지만물을 감성안테나로 칼날같이 분석하신 오세영의 '12월'.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허무를 위해서 꿈이/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안쓰러 마라./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사랑은 성숙하는 것.//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눈 떠라,/절망의 그 빛나는 눈.". 아,12월 잘 가거라. 12월은 내년에도 또 찾아 오겠지만 지난 한 해와 지난 12월은 영원 속으로 사라지겠지.

관계가 있나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인간은 같은 시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뭐야. 한해 마무리하는 순간에 '발꼬랑내' 나게. 니는 뭐야. 좋은 말이 있으면 새겨 들어야지. 이헌태도 성질 낼 때가 있구만. 그럼 12월을 뜻하는 '고품격 글'이 있죠. '생자필멸', '회자정리'. 뭐야. 기분 좋은 12월에 죽는다는 얘기는 왜 하는거여. 이헌태의 화두는 스님들의 '뭐꼬' 보다 지랄이 하나 더 실리고 무식이 하나 더 보탠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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