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효종 연간과 숙종 초년에 청나라를 치기 위한 일련의 논의.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은 처음에는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인조 14년(1636) 후금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조선에 대해 명과의 국교단절과 신속(臣屬)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병자호란을 맞았다.
국왕이 후금의 왕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런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효종은 복수를 위해 군비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禁軍)을 정비 개편했으며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군비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推刷)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親淸派)인 김자점(金自點)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송준길·김집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효종의 북벌에 대한 집념과 의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결국 1659년 효종이 죽자 북벌론은 무산되었다.
한편 숙종 초에도 윤휴(尹휴)·허적(許積)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戰車)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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