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의 '사랑'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때.
서로에 대한 존경과 절제로 빚어내는 사랑은 실로 아름다웠다고 기억된다.
하지만 독서모임에서 그 책을 다시 읽자고 했을 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자리잡힌 나이에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을 새삼스럽게 논한다는 게 진부하게 느껴졌다.
대충 줄거리를 더듬다가 도서관을 찾았다.
놀랍게도 젊은 날 우리들이 애독했던 책들은 신간서적들에 밀려 지하 창고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직설적이고 요란한 현대식 사랑론 앞에서 춘원도 무릎을 꿇은 것일까. 어렵사리 책을 구했지만 둥지 잃은 새 마냥 몸과 마음이 허전하다.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넘기자 오래된 책 향기가 곰실곰실 기어나온다.
추억을 더듬으며 책속 인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고 엄숙할 정도로 이지적이다.
무엇보다 안빈의 처 옥남이 빚어내는 사랑에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한 남편의 아내이며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서 오는 동질감 때문일까. 숱한 갈등으로 몸부림치면서도 하나 하나 높은 단계로 자신을 승화시켜나가는 삶. 그녀의 사랑이 눈부신 것은 상대에 대한 믿음과 희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 그동안 나는 사랑이라는 말 앞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녀에 비해 내가 추구하고 길들여져 온 사랑은 탐욕적인 욕심이거나 정신적인 허영에 불과하다.
변형된 사랑은 질투와 불신으로 스스로를 파괴시키지만 진정한 사랑은 투명한 빛처럼 세상에 녹아드는 법.
이기적이고 일회적인 사랑은 결국 우리 존재를 가볍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빚어내는 사랑의 음계는 어떤 것인지 돌아보고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잊혀져 가던 책 한 권이 조율되지 않은 삶을 팽팽하게 긴장시킬 뿐 아니라 마음의 장님으로 신간서적과 베스트셀러를 쫓아다니는 어리석음까지 깨우쳐 준다.
뿌듯한 감동이 있는 밤. 이 즐거움으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 것이리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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