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北京)의 한겨울은 살을 에듯 춥다.
그러면서도 공기가 건조해 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피부는 수분을 빼앗겨 알레르기로 고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겨울의 베이징은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여름철엔 젊고 날씬한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은채 씩씩하게 자전거를 타고가거나 속이 훤히 비치는 시 스루 룩(See-Through Look)으로 자못 현란한 광경을 연출하지만 겨울철엔 사정이 달라진다.
지난 90년대 초중반까지 서민들의 대중적 겨울패션이었던 솜 넣은 국방색의 군인풍 외투를 이전만큼 흔히 볼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서 눈에 띈다.
여성들은 후드가 달린 멋없는 긴 방한 코트 일색이고, 남성들은 보온에만 신경쓴 거무죽죽한 차림 일색이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돼 중국인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한류(韓流)가 패션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하기야 파리나 뉴욕의 패션흐름이 거의 리얼타임으로 전파되는 이 시대에 중국사회에서 한국패션의 영향력을 찾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영향력이 미미하다 할지라도 모처럼의 한류에서 패션쪽은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다.
베이징(北京)의 옌사(燕沙) 백화점 인근에 있는 의류상가 '뉘런지에(女人街)'. 지하 1,2층 전체가 1~2평 정도의 가게에서부터 20여평 정도의 패션숍까지 크고작은 기성복점포들로 빽빽하다.
어림잡아 500개는 넘음직하다.
수백 수천개의 미니점포들이 밀집한 우리나라의 대형 패션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직 중국사회에서는 꽤 큰 의류상가로 꼽힐만하다.
이곳에서 한국산 의류를 취급하는 점포는 대략 20 여곳. 대개는 한두평 짜리의 미니점포이지만 너댓군데는 제법 규모가 크다.
한복점도 눈에 띈다.
그중 노른자위라 할만한 위치에 3개 연이어 있는 한국의류점은 이곳 뉘런지에의 좁고 문 없는 대부분의 점포들과는 달리 규모도 제법 크고 패션숍다운 분위기도 살려 한국의 어느 소박한 옷가게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다.
이들 한국옷 가게에는 공통적으로 '한구오징핀디엔(韓國精品店)'이라는 선전문구들이 붙어있다.
원단이나 디자인이 좋은 한국제품만 취급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가격은 대체로 중국산 옷에 비해 2~3배씩 비싼 편.
'Korea'라는 상호가 붙은 가게에 들어가 봤다.
10~30대까지 입을 수 있는 캐주얼풍의 옷을 위주로 하여 머플러, 스타킹 등 패션소품을 취급하는 곳. 마침 이 가게의 단골이라는 중국인 부녀가 옷을 입어보고 있었다.
성이 리(李)라고 밝힌 퇴직 공무원 출신의 60대 초반 아버지는 보통의 중국인에 비해 매우 서구화된 듯 청바지에 베레모까지 쓴 모습이다.
오늘은 시집간 딸에게 코트를 사주러 온 거라고 했다.
밤색 인조 세무 소재의 롱 코트를 입고 이리저리 거울에 비쳐보는 딸을 보면서 아버지는 "옷이 커서 한 번 줄였는데 그래도 안 맞아 이번에 다시 고쳐 세 번째 왔다"면서 "멀리 하이띠엔취(海淀區)에서 오느라 그간 든 택시비만도 200 위안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35살이라는 딸 리위에(李悅)씨가 이날 산 코트는 1천 위안(15만원)짜리. 중국 대학교수 월급이 1천 위안 정도인 것을 염두에 두면 상당한 고가다.
판매원인 조선족 김연순씨는 "아버지가 멋쟁이예요. 사는 형편도 좋은 것 같고. 한국옷을 좋아해서 부인이나 딸에게 사주러 가끔씩 오셔요"라면서 "신제품이 들어오면 이런 단골들에게는 전화로 알려줍니다"고 말했다.
단골의 50% 이상은 중국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에도 20대 여성 몇 명이 들어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어보고는 가격도 물어보더니 다음에 오겠다고 나갔다.
김연순씨는 "중국여성들은 몸에 딱 들어붙는 스타일을 좋아하죠. 힙합스타일은 싫어들해요. 한국 여성들에 비해 골반이 좁아서 특히 바지는 골반부위가 헐렁할 경우가 많아요"라고 말했다.
바로 옆에 있는 또다른 한국옷집 '쵸우쵸우'. 벽에 걸린 한류 열풍의 주역 탤런트 김희선의 사진이 유혹적이다.
조선족이라는 40대의 판매원 김태화씨는 "허락없이 김희선 사진 내걸었다고 문제가 되는건 아니겠죠?"하면서 겁부터 냈다.
김태화씨는 재작년만 해도 한국옷가게는 쵸우쵸우 뿐이었으나 1년여만에 20여개소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처음엔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절반 정도 깎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몇몇 집은 망해서 나갔지요"라고 말했다.
한 층 위의 매장은 의류 외에도 각종 패션용품과 잡화류를 함께 취급하고 있었다.
'한구오청(韓國城)'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상품 매장으로서 지난 해 12월 7일 문을 열었다.
여성의류 화장품 액세서리 아동복 운동화점 커피숍 등 9개의 전문점들로 나뉘어져 있어 뉘런지에의 미니 한국쇼핑코너인 셈.
서울에서 온 성이 송(宋)이라고만 밝힌 한구오청의 대표는 "아마 베이징에서 여기같은 성격의 매장은 보기 힘들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지금은 9개 품목이지만 조만간 15개의 전문품목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점한 지 얼마 안되기는 하지만 생각외로 고객은 한국교민보다 중국인이 더 많아 60~70% 쯤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사이 베이징 곳곳에서는 한국 의류를 취급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는 지오르다노 신원에벤에셀 같은 알려진 브랜드도 소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름없는 브랜드 제품들이다.
물론 중국 일반대중의 패션수준에 비해서는 고급스럽지만 품질에 비해 가격이 높은 경우가 적지않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한국패션의 진면목을 알리기엔 크게 미흡한 수준. 게다가 한국패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신상품이 진열되면 2~3일만에 조악한 품질의 모방품이 나오는가하면 심지어 버젓이 한국 상표가 붙은 의류 중에서도 가짜상품이 있다고 상인들은 귀띔했다.
여하튼 중국사회에서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월드컵 등의 영향으로 한국것이라면 무조건 고급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한국패션을 중국에 상륙시키기 위해서는 서민대중을 위한 저가품에서부터 신흥부유층을 겨냥한 최고급 하이패션까지 다양한 그레이드의 옷들로 장기적 차원에서 중국패션시장을 공략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경옥기자 sirius@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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