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이강철 사단', 민주화 주역 정치전면 나설까

입력 2002-12-27 15:18:00

운동권(정확히 말하자면 70, 80년대 지역의 운동을 주도했던)에도 '햇볕'이 들까.이들이 오랜만에 전면에 나서 주역을 맡았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대구와 경북 선대본부가 각각 24일과 26일 해단식을 갖고 제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대개편을 거쳐야 할 지역 민주당에서 이른바 '이강철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이 지역 민주당의 주축으로 부상, 정치의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한다.

물론 이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권 전체는 아니다. 87년 개헌투쟁과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고 지역의 학생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세력들로 85년 대구.경북지역 재야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주역이다. '이강철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시대를 되돌아가보자. 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31년간의 TK 정권시대.

애초 이 곳에서 '정권 타도' 구호를 내건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 대구.경북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 때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빛을 볼 일은 없으면서 피를 볼 때는 똑같이 당해야만 했다.

이강철 사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장소는 화원교도소와 지역소재 대학.

민청학련 사건으로 74년 수감돼 복역중이던 이강철(경대 66학번)씨는 81년 출소 후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고 83년 당시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기지개를 켜고 있던 학생운동의 배후 내지 지원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학생들이 '사고'를 치면 으레 이씨와 그 주변이 의심을 받았다. 당시 이씨는 그들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강철 사단'은 70년대 학번이 주축이다. 이들이 대구.경북에서 민주당 선거대책본부를 이끌며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으로 선거를 진두 지휘했다.

김진태(계명대 75학번).이태헌(영남대 72학번) 대구와 경북 선대본부 총괄단장과 김학기(계명대 79) 대구 정책실장, 임규헌(계명대 85) 대구 청년국장, 김태호(경북대 84) 경북 사무부처장 등은 이번 대선에서 지역의 선거 실무를 맡아봤다.

노 후보 선대위의 방계 조직인 국민참여운동본부의 남영주(경북대 77) 사무처장과 박재빈(영남대 81) 사무차장, 박재형(경일대 85) 대외협력국장 등도 이씨 그룹의 핵심이다. 송무학(경북대 89) 중앙선대위 조직부장은 이 사단의 막내다.

특히 이씨 후임으로 민통련 사무국장을 지낸 남영주 처장과 14대와 15대 총선에서 대구 남구에 출마했던 김진태 단장, 79년 '화원'교도소에서 이씨와 인연을 맺은 이태헌 단장 등은 이 그룹의 3인방으로 불린다.

추연창(영남대 73) 희망의 시민포럼 대표나 정문수(영대 73) (주)지스코 사장도 이씨 주변 인물로 음으로 선거를 도왔다. 또 기획사를 하고 있는 최정돈(영남대 79)씨도 주요 멤버다. 이성해(영남대 78)씨는 누나의 친구인 황일숙(47)씨를 이씨에게 소개, 95년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또 87년 김대중씨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논리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박종덕(경북대 78)씨도 이씨 그룹으로 분류된다.민통련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줄곧 정책분야를 맡아본 김학기 실장과 지난 6월 대구 수성구청장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충환(영남대 79) 전 국민회의 대구사무처장이 그 아래 그룹을 이루고 있다.

이씨에게는 유독 따르는 후배가 많다. 어려울 때 뒤도 봐주고 많이 베풀기도 해서인지 이씨가 제도 정치권에 진입을 시도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정치적으로 방황을 할 때도 대부분의 후배들은 이씨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이 오늘날 이강철 사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동관기자 llddkk@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