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한해가 또 저문다.
항상 아쉬움과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지만 언제부턴가 세모의 페이소스는 잘익은 커피향처럼 더욱 짙어져가는 것만 같다. 나이듦의 의미에 천착해야 할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올해는 유난히 '나이먹기' '늙어감'에 관한 책들이 서점에 많이 깔렸었다네. 많은 이들이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 참가했다는 증표이기도 한데 왜 그랬을까. 나이는 잊고 사는 게 좋다고들 했는데, 새삼스럽게 나이듦을 전염병처럼 소리 소문없이 저간의 화두로 회자되게 만든 배경은 무엇일까.
뻔할 것같은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듦의 의미를 일깨우고 공론화하는 현상은 이 사회의 희망을 말하고 있음인지, 절망을 말하고 있음인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인지, 살맛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구나.
행여나 제3, 제4의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혼돈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무형의 테제적 억압 앞에서 보다 인간적이고 싶어하는 작은 몸부림은 아닌가. 솔직해짐으로써 인간다워지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
벗이여.
올해 우린 고향에서 열린 단축 마라톤대회에 참가했지. 영하의 냉기속에 따끈한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진한 커피색깔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안개를 바라보듯 우리의 마라톤은 올해 했던 일중 가장 뜻깊은 일이고 아름다운 사건이었네. 비록 무릎을 다쳐 오랫동안 고생을 했지만.
옛날 가난했던 어린시절 조촐한 건빵파티처럼 또하나의 멋진 추억이 될걸세. 고향과 벚꽃 화려한 봄날과 마라톤- 참으로 환상적인 조화였다. 어릴적 이곳 저곳 논밭으로 엄마따라 끌려다니며 김 매고 심부름하며 흘리던 땀방울 이후 수십년만에 고향땅에서 흘린 또다른 땀방울은 참 상쾌했지.
마라톤은 참 좋은 운동이다. 많은 사람이 함께 뛰지만, 주변의 격려와 응원을 받지만, 결국은 혼자 가는 길. 성급해서도 안되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길. 상념과 철학이 쌓이는 길. 그 길엔 사치스런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
생각나는가. 벗이여.
젊은 시절 봤던 영화 '마이웨이'.
프랑크 시나트라가 주연을 맡고 주제가까지 불러, 주제가 '마이웨이'를 거의 명곡으로 만든 영화. 자네가 중요한 일로 대구에 왔다가 개봉관에서 함께 봤던 영화였지.
줄거리는 기억건대 독선적인 아버지와 반항하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승부같은 마라톤 완주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이뤄졌던 것 같다. 주인공의 이름이 매독스였지 아마. 관람후 다분히 한국적인 영화라고 얘기 나눴던 기억도 나는구먼.
부드러우면서도 격조있는 시나트라의 목소리에 담은 주제가 '마이웨이'가 비장미를 더하는 가운데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늙은 아버지의 처절하고 고독한 모습. 주제가의 절창에 맞춘 결승점 골인 장면. 압권이었지.
그 영화의 감동은 '마이웨이'라는 제목의 카리스마로 남아 있었다. 그게 언제인가·20여년전. 당시 반항하는 아들이었던 우리가 어느새 반항의 대상인 아버지가 되었네 그려.
우리가 젊은 시절 나이들면 영화 '마이웨이'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저 영화였고 영화속의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던가. 또 그 생경스런 마라톤을 나이들어 하게 될 줄을, 달리면서 영화속 아버지로 돌아가게 될 줄을 상상이나 해봤었던가.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다가오듯 나이와 여한들은 그처럼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이제 우리가 영화의 주인공처럼 정녕 '마이웨이'를 노래하며 달려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벗이여.
앙상한 가지 끝나리에 붙어 차가운 바람에 휘둘리는 마른 잎새에게 무슨 가식이 필요하랴.
위선과 궤변 몰상식들이 표독함과 떼거리의 힘으로 무장해 간단하게 정당성을 획득하고, 말없는 다수 내지는 비겁한 다수를 질식하게 만드는 질곡의 시대지만 한해의 마지막 세모는 인간의 것이어야 한다. 대선 결과와 관련한 일들, 북핵문제와 반미감정 등 무거운 분위기로 채워져 있는 세모에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탄일이 세모의 길목을 지키고 새해 새날까지 축일이 이어져 있음의 의미도 그런 것일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기에 오히려 한숨돌리고 가기를 바라는 이 시간은 커피브레이크같은 작지만 소중한 시간.
벗이여.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쓰러질듯 쓰러질듯 쓰러지지 않는 아버지의 투혼으로 내년 봄의 마라톤을 준비하게나. 장려한 모습도 비감한 모습도 필요없이 우리는 이 세모에 인간의 일을 다시 준비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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