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헷갈리는 시대이다. 옛날에는 선(善)이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악(惡)이 되기도 하고, 옛날에는 악(惡)이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선(善)이 되기도 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절약은 만고불변의 미덕(美德)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개인이 너무 절약하여 소비가 줄면 나라 경제가 살아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선이었던 것이 나라경제의 입장에서는 악이었던 것이다. 소위 '합성의 오류(誤謬)'란다. 일본 경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거꾸로 옛날에는 악(惡)이었던 것이 지금은 선(善)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끝난 중국 공산당 16차 전국 대표회의에서 '붉은 자본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그렇다. 공산당에 있어서 자본가는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악(惡)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은 '붉은 자본가는 중국적 사회주의 건설의 역군'이라며 선(善)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중국 GDP(국내총생산)의 3분의 2를 민간부문이 차지하고 있는 만큼 공산당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정치권이 '야합'이냐, '결단'이냐를 놓고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는 대선후보 단일화도 그렇다. 옛날식 가치로 보면 이것은 분명 명분이 없다. 이념과 정책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점은 민주당 노무현후보도 인정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고 신사의원으로 평가받고 있는 같은 민주당 조순형의원마저 "DJP공조는 내각제를 고리로 했는데 뭘 가지고 단일화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단일화에 명분이 없음을 지적했다. 정책연합이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는 벌써 DJP연합의 실패라는 경험마저 갖고 있다.
그런데도 단일화는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40~60%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쯤이면 명분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참으로 선인지 악인지 헷갈린다. 확실한 명분은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말해주겠지만.
햇볕정책에 이르면 더욱 헷갈린다. 북한이 일으킨 서해교전을 두고는 '의도적이다'와 '우발적이다'로, 북한 핵개발을 놓고는 '사실이다'와 '미국의 과장이다'로, 북한이 가지고 있는 대량살상무기는 '우리에 대한 위협이다'와 '우리에 대한 위협용은 아니다'로 맞서 있다. 양쪽 다 애국(愛國)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어느 한쪽은 애국이 아니다. 아직은 규명될 수도 없다. 다만 '옛날의 선'과 '오늘의 선'이 대결한 것이다.
이러한 헷갈림이 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교육문제다. 우리 사회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액면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교사는 아직도 존경의 대상이다. 그런데 소비자주권이라는 말이 나돌더니 어느새 일부이기는 하지만 학부모와 심지어는 학생들로부터 교사가 구타당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가치의 다원화인가. 아니다. 가치의 혼란일 뿐이다.
왜 이렇게 선과 악의 구별이 애매하고 또 다원화는 혼란으로 연결되고 마는 것일까. 애매한 것이야 인류가 만든 질서와 제도 속에 절대선(絶對善)이 없다는 새로운 질서때문이겠지만 혼란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원화 시대에 살면서 행동은 일원화 시대의 의식과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결과 충돌이 일원화 시대의 가치였다면 공존과 공생은 다원화 시대의 가치인 것이다. 반대논리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원화 시대에 살면서 개혁이냐 반개혁이냐,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민주화냐 반민주화냐하는 이분법만 존재했다. 그러니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유를 빙자한 방임이 안 되듯이 다원화를 빙자한 혼란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국민의 선택에 따라 이러한 혼란은 다원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도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지만 어느 것이 주류이고 어느 것이 비주류인지는 명확해 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류와 비주류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공존의 새질서를 세워야 한다. 경제가 어려웠던 90년대 초 "이젠 경제야, 바보야"라고 외쳤던 클린턴처럼 지금 가치의 혼란이 사회적 위기를 낳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젠 질서야, 바보야"라는 외침이 제격이 아닐까.
〈본사 서상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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