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모습은 그저 소박한 농촌마을이다. 성주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신흥천이 앞을 가로질러 곳곳에 옥토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부터 민속마을 조성공사가 한창인 이곳은 여느 전통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즐비한 고가옥들은 찾아 볼 수 없다.
대대로 전해온 풍습도 사라진지 오래다.하지만 학산정 초가 마루에 앉아 마을내력을 전하는 촌로들의 모습은 선비의 지조를, 마을 북쪽어귀 산 아래에 앉은 경의재(景義齋)와 남쪽끝자락의 소류정(小流亭)은 이 마을의 전통교육과 뿌리깊은 충효정신을 말해준다.
청송군 파천면 청송 심씨 집성촌인 덕천마을. 정몽주.길재 등과 함께 고려 망국의 한을 품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며 두문동에들어갔던 충신 악은(岳隱) 심원부(心元符)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다.
청송에서 안동 방면 지방도 914호선을 따라 읍내를 막 벗어나 가풀재(갚을재)에 오르면 덕천마을이 한 눈에 들어 온다. 150여호의 촌가들이 성주산을 등받이 삼아 길게 앉아있다. 대부분 새로이 단장된 집들로 띄엄띄엄 보이는 한옥 대여섯채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게 한다. 마을을 가로질러 동서남북 사통팔달로 아스팔트 도로가 뚫려있다.
때아닌 황사바람을 안고 마을안으로 들어가면서 왠지 모래길을 걷는 듯 발걸음이 무거워져갔다. '이미 이 마을은 전통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구나'하는 생각으로 아쉬워할 즈음 눈 앞에 고풍스런 목조건물 한 채가 나타났다.
그 유명한 심부자집 송소고택(松素古宅)이다. 경북도 민속자료 63호. 지난해부터 유교문화권개발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가 한창이다. 허물어진 흙담장을 새로 올리고 이끼와 잡풀들로 퇴락한 지붕을 갈아끼우고 있다. 청송군은 65억원을 들여 덕천마을을 민속마을로 조성하기 위해 고가옥6동을 보수하는 한편 줄다리기와 동제 등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나섰다.
99칸 입 구(口)자형에 2중 담장 구조인 송소고택은 솟을대문에 홍살을 설치한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 안채.사랑채마다 마당과 정원이 있고 별채에 디딜방앗간을 따로 만들어 한 눈에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웃한 고가의 기왓장 틈새로 잡초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게 한다.
"줄다리기 등 풍습도 사라지고 있어. 겉으로야 어디 전통마을이라 할게 있나. 그저 조상들을 잊지 않으려는 고집과 지조를 지키려 애쓰는 게지".22세손인 심완택(79)옹의 말 속에서 그들이 가문과 마을의 전통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고집을 볼 수 있었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1천여 명이 모여 줄다리기를 했을만큼 전통의 정취가 짙게 남아있었다. 그때는 덕천리 인근 신흥.이사.지경리 등 수상(水上)지역과 관리 등 수하(水下)지역 마을사람들도 대거 참가했다. 줄의 길이가 70m에 이르고 둘레가 1.5m로 원(元)줄에 종(從)줄을 매달아 놀았는데 윗줄(수상지역)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했다.
현대화 물살 속에서 20∼30여채의 목조 한옥들이 뜯겨지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 집들이 차지했다. 청송 향교 전교를 지낸 심찬섭(83)옹은 "20년 전까지만 해도 규모가 제법 큰 한옥들이 즐비했었다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객지로 떠나고 집이 팔리면서 옛 모습이 사라졌어"라며 씁쓸해 했다.
현재 이 마을엔 130여 가구에 350여 명이 살고 있다. 청송 심씨가 80호, 달성 서씨 30호, 아산 장씨 10여호. 60세 이상 노인인구가 300여명으로 대부분 고령화된 이 마을에서는 아직 귀농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난날엔 심부자로 소문난 마을이었으나 해방 이후 대부분의 토지를 인근 농민들에게 재분배, 경지면적이 적어져 지금은 그리 넉넉한 생활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심씨들은 지난 96년까지 청송읍 월막리에서 양조장을 운영했으나 이마저도 팔아버렸다.
비록 지난날의 부와 명성은 퇴색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전통보다 마음으로 이어가는 전통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청송 심문 대종회는 매년 여름방학에 전국의후손들을 모아 전통.예절교육을 실시한다.
19년째 이어오는 행사다. 악은공 24세 종손 영섭(66)씨는 " 문중의 내력과 뿌리를 배우고 충.효.예 등전통사상과 풍습을 익혀 문중에 대한 긍지와 함께 사람의 도리를 일깨워 주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전통교육의 장(場)인 경의재는 악은선생을 비롯해 3대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지난 1982년 새로 건립, 매년 음력 3월25일 향사를 지낸다.전통에 연연해 하지 않고 나름대로 올곧은 정신과 가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이들의 지조와 고집은 향천(鄕薦) 의병대장이었던 심성지(1831∼1904)선생이 일생을 보낸 소류정에서 비롯되고 있다.
최근 공개된 '적원일기(赤猿日記)'에는 심성지 선생의 의병활동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 안덕면 감은전투 승리 이후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전연구 등 학문에 전념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 있다.
덕천마을의 전통은 이미 퇴색의 길로 접어들었다. 행정기관에 의해 새롭게 가꾸어지고 있지만 현대화의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게 됐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 마을이 품어온 전통의 향기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김경돈기자 kdon@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