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돈 굴릴 데 없다

입력 2002-11-14 12:17:00

지난 9월말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서 대출홍보 전단지를 돌리던 국내 모 시중은행의 직원 2명이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특기할만한 점은 사고 시간이 새벽 3시라는 점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새벽에 대출홍보 활동에 나서게 했을까. 국내 금융회사들이 자산 운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돈을 굴릴만한 데가 없다는 것이다.

대출 수요는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없고, 주식에 투자하려니 증시 침체로 원금 손실 걱정부터 앞선다. 궁여지책으로 가계대출 쪽으로 영업을 확대해 봤지만, 가계 부실에 의한 신용대란을 우려한 정부당국의 서슬이 퍼렇다.

최근 신용협동조합들이 무더기로 퇴출된 것도 자산운용 부실화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협은 은행에 비해 조달금리(수신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역마진 사태를 피하려고 고위험 투자처에 자산을 굴리다가 부실화 사태를 맞았다는 것이다.

대구지역 모 종금사 관계자는 "고객 가운데 신협.새마을금고 등 서민금융기관도 있는데 일부는 자신들이 조달한 금리보다 낮은 금융상품에 가입, 역마진을 감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유니온상호저축은행 장동수 부장은 "우리 회사의 경우 여유자금이 적정수준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무리한 예금 유치 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으며 안전한 대출거래처 확보를 통한 여신 증대에 전 직원이 매달리고 있다"고 했다. 자산운용에 곤란을 겪기는 은행.증권.보험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금융회사들마다 우수 여신거래처 확보로 부심하고 있으며, 우량 여신고객 확보를 위한 '대출세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부 금융회사는 노마진 대출로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는 등 사활을 건 '돈 꿔주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 경쟁을 벌이면서 10월말 현재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은 196조9천400억원으로 지난해말(160조4천400억원)에 비해 22.7%(36조4천900억원) 증가했다. 은행권 전체 대출금(480조3천200억원)에서 중소기업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41%로 높아졌는데 이는 가계대출 비중(45.8%)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대구은행 김종선 자금팀장은 "종전에는 은행내 여신파트나 자산운용파트로 자금을 배분하고 통제하는 것이 자금팀의 주요업무였는데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며 "해당부서에서 원하는대로 분배해 주는데도 자금은 늘 남아돈다"고 말했다.

이 은행 백용선 기업영업기획팀장도 "IMF 위기를 거치면서 금융기관 돈을 무분별하게 끌어쓰지 않겠다는 인식이 기업인들 사이에 보편화됐다"며 "우량기업들 중에는 아예 은행을 상대로 '네고'(이율 및 상환 조건 협상)를 내는 곳도 많다"고 했다.

김해용기자 kimh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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