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해우소와 응가방

입력 2002-10-23 14:16:00

단풍의 계절. 옆 돌아 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도 이 가을만큼은 한번쯤 산을 찾아 스스로를 추스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 든 산 속 오솔길을 힘들게 오르며 가치 있는 삶의 길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어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낙엽 쌓인 가을 산을 오르다 보면 산사(山寺)를 만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배설의 장소가 필요하기 마련, 산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찰에서는 '배설'이라는 문제조차 수행의 한 과정으로 여겨, 이름부터 '해우소(解憂所)'라 했다. '해우소', 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버림으로써 번뇌 근심을 풀어낸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그런 해우소는 대개 절집과는 뚝 떨어진, 멀고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 많다.

요즘 서울 도심지에는 '응가방'이란 곳이 생겨났다. 소위 코인(coin) 화장실이다. 이 곳은 1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문이 열려버린다고 한다. 이처럼 화장실이라는 표현이 대중화되어 있지만 옛 말로는 뒤를 보게 만든 곳이라는 '뒷간' '측간(厠間)' '측실(厠室)' '서각(西閣)''혼측( 厠)' '정방(淨房)' '회치장(灰治粧)' '변소(便所)'라는 이름이 있고, 크게 잘 꾸민 뒷간을 '측청(厠 )' 이라 하고 함경도에서는 '정낭' 또는 '정낭간'이라 하며 경상도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곳이 많았다.

산사의 해우소든 도심지의 응가방이든 뒷간은 가까우면 냄새가 나고, 그래서 "뒷간과 사돈집은 멀어야 한다"는 옛말이 생겼으리라 본다. 어쨌든뒷간은 없어서는 안되는 곳이지만 멀 수록 좋다는 말은 현대에 와서도 늘 깨끗하게 유지하라는 뜻일 것이다. 오래 차지하고 있으면 저절로 문이 열려버리는 코인 응가방에서는 더 버텨도 될까, 말아야 하나 하는 조바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우소는멀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가서 시원하게 버림으로써 번뇌와 근심을 풀어낼 수 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해우소가 아니더라도 필요하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더 좋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처럼.

영남이공대학 건축과교수·경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최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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