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개천절 노래 中)". 국조 단군을 기리는 10월3일 개천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삼국유사 등에 전해오는 단군 기록을 일컬어 '신화'가 아닌 '역사'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역사학계의 주류 견해는 건국신화로 해석하고 있다.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단군할아버지'. 단군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신화속에서 걸어나온 단군을 만나보자.
▨ 단군신앙의 현장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 불령산 중턱. 수성관광호텔 뒤편에 위치한 이 산의 새로 난 오솔길을 100여 미터쯤 허위허위 오르다보면 '국조단군성전(國祖檀君聖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아래 알록달록한 네온사인을 켠 음식점이 즐비한데, 이곳은 심심산중의 절터를 연상시킨다.
돌계단을 올라 들어선 성전 내부에는 제단을 차려 단군상과 영정을 모시고 있고, 단군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천부경(天符經)'이 왼편에 걸려있다.성전안을 기웃거리자, 하얀 모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분이 반갑게 객을 맞는다. 12년째 이곳을 시봉하고 있는 '단군지킴이' 박명수(76)씨.고희를 훌쩍 넘긴 고령에도, 음색이 자못 쩌렁쩌렁하다.
"올해는 환웅할아버지 이후 18대 왕들이 나라를 다스린 1천565년과 단군왕검 이후 4천335년을 더한 개천 5천900년 되는 해"라며 의미를 되새겼다.박 할머니는 또 "단군할배는 우리 배달민족의 공통된 조상이지 신격화나 종교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 할아버지를 신으로 받들어 모셔서는 안되는것과 마찬가지"라며 단군에 대한 일부의 비난을 안타까워했다.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조부가 영양군 현동에 부인당(符印堂)을 세워 단군을 섬긴 것이 계기가 돼, 평생을 '단군 사랑'에 바쳤다. 선친도 부인당에서 단군을 시봉했고, 박할머니 자신도 단군을 섬기고 있으니 3대째 외길을 꿋꿋이 걸어오고 있는 셈이다.
박 할머니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때 제사를 올리며, 매년 '어천절'(3월15일)과 단군황후인 비서갑시모의 제일(2월15일)을 봉양하고 있다.대구의 단군관련 역사를 줄줄 꿰고, '태극'의 의미까지 상세히 논하는가 싶더니 주역을 비롯, 천문학, 풍수지리학, 정역 등에 이르기까지 공부량이 상당했다.재미있는 것은 박 할머니는 개천절을 음력으로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올해의 경우는 11월3일, '입동'날이다. "나라에서 편의상 양력으로 개천절을 모시고 있지만, 원래는 음력이 맞아요".
과연 그러한가 싶어 살펴보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기가 어렵고, '10월 3일'의 의미가 소중하다는 생각에 1949년부터 양력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개천절'의 기원은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BC 2천457년 음력 10월 3일에서 비롯한 것이다.현재 박할머니가 시봉하는 국조단군성전은 지난 1980년 전 문교부장관 안호상박사가 사재를 털어 마련한 시설이다. 박 할머니는 또 "일정시대때는 달성공원에 일본의 '천조대신'을 모신 신사가 있었는데, 해방직후 단군영정을 그곳에 모셨다. 그때는 달성공원의 현판도 개천문이었다"며 해방전 역사까지 술술 풀어놓는다.
할머니 이후에 누가 이곳을 모시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당연히 나라에서 관리해야지요. 일부에서는 개인이나 단체에서 모시는데 옳지 않아요". 박 할머니의 꿈은 단군상과 비서갑시모상을 옥으로 만들어 꾸민 단군성전을 새로 짓는 것. 이곳이 새단장되면 매년 개천절때나 사람이 오고가는 이곳이 대구의 전통있는 명소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란 소망도 덧붙였다.
▨ 역사속의 '단군'
현재 전해져오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지상에 내려와 웅녀와 만나 단군을 낳고 나라를 열었다'는 단군고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연원한 것이다.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웅녀와 환웅의 결합은 당시 천신족과 지상족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단군'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태양신을 의미하는 순 한국말 '밝은님'이 이두표기이후 '단군'이 됐다는 설, 고대 제정일치시대 제사장이었던 '천군'의 음이 와전돼 단군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문헌으로 확인되는 단군신앙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다. '삼국사기'의 '선인왕검(仙人王儉)'기사와 묘청이 지은 팔성당의 하나인 '구려평양선인(駒麗平壤仙人)'등에서 중세까지도 단군을 시조신으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거란과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자 민족적인 단결을 위해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는 저술이 행해졌으며, 조선시대에도 단군을 모시는 국가적 행사가 치러졌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단군을 통한 민족자주성 고취를 위해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1909년에는 나철이 단군교인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해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 단군상의 수난
민족 시조로 숭상되는 단군은 그러나 뜻밖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정확히 말해 '단군상'이 수난을 당한 것은 살벌한 일제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최근에 와서였다.지난 1998년 민족정기함양을 기치로 출범한 '한문화운동연합'이 전국의 각급 학교와 공공기관등에 단군상을 세운 것과 관련, 기독교 신도들이 조직적인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단군상 건립을 둘러싼 논쟁이 촉발됐던 것.
당시 초등학교에 설치된 일부 단군상의 목이 잘려나가고, 심지어 세종대왕, 이순신 상이 단군상으로 오인받아 훼손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 사태는단군상을 훼손한 혐의를 받은 목사가 구속되고, 기독교신도들이 대규모 항의집회까지 갖는 등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지난 8월에는 한국교회가 성명을 발표하고 단군상 철거운동을 벌이면서 또다시 촉발되는 등 단군상을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공공장소에 세워진 단군상은 국민적 합의도 없고, 교육자재로도 적합하지 않은 명백한 불법"이라며 철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감정적인 단체들의 정면반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단군을 기리는 단체 '(사)현정회(www.tangun.or.kr)'에 실린 글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단군상이나 단군성전 건립과 관련한 기독교인들의 반발은 기독교인들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국조 단군'을 역사적 주체가 아닌, 종교화·신격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군은 우리 한민족의 공통된 시조이지 어느 단체나 개인에 의해 신격화·사상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군고사에 대해 다소 중도적인 입장에서 결론 짓자면 이렇다. "신화가 없는 나라의 역사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라고.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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