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카드 중독증 해부

입력 2002-07-12 14:08:00

"소중한 사람에게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면, 열심히 일한 당신이 훌훌 털고 도시를 떠날때조차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신용카드?"

신용불량자가 250만명을 넘어서고, 카드빚 때문에 유괴.살인을 저지르거나 목숨을 끊고, 몸까지 팔았다는 불쾌한 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타지만 TV 광고속 주인공이 내미는 신용카드는 하얀 와이셔츠만큼이나 눈부시다.

그러나 신용카드의 달콤한 속삭임에 따른 책임은 전부 개인의 몫. 해악이 은폐되고, 효용만 과대포장된 '신용카드'는 위험한 '양날의 검'이다.

새책 '신용카드 제국'(로버트 D 매닝/참솔/1만8천900원)은 신용카드 제국의 원인과 사회적.경제적 파장 등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신용카드회사들이 경제와 사회분위기에 따라 광고카피를 카멜레온처럼 바꿔가며 어떻게 카드중독을 부추기거나 심화시켰는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요즘의 한국과 소름끼치게 닮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국의 경우 레이건 정부 이후 실업률 상승과 실질소득 감소가 지속적인 저축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때 신용카드사는 구조조정과 경기침체로 길거리에 내몰린 중산층뿐 아니라 블루.화이트 칼라층까지 파고들었다.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파산한 개인한테까지 카드를 내밀었다.

"그저 사용만 하세요"라는 광고카피를 내세워 미국인들이 몇세대를 거치면서 유지해왔던 '번만큼 쓴다'는 의식 대신 소비지상주의를 조장했다. 충동적이고 소비에 탐닉하는 사회분위기가 일반화된 것이다.

저자는 신용카드의 팽창이 기업에게 자금을 꿔주기보다 개인에게 대출하는 소매금융에 치중하는 게 수익성이 좋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금융정책의 변화와 일치하고 있다. 결국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조장되거나 강제된 상황에서 현대인은 카드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신용카드는 또한 '현대판 골품제'를 만들어내 차별을 부추긴다. 사회적 명사를 모델로 기용해 광고하고, 노인과 고아들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자선욕망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심지어 포인트와 적립금을 내세워 근검절약정신까지 카드 마케팅에 이용한다.

저자는 미국내 '시티그룹'이 소매금융을 통해 이윤을 증대하는 과정과 현금서비스도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을 이용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사채업자의 충격적인 실태도 밝혀냈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여연대 등 NGO들이 최근 카드수수료 인하 운동 등 신용카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갖고 싶지만 꼭 필요한지" "욕심나지만 갚을 수 있는지" 점잖게 충고하는 최근 신용카드 광고도 소비자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한 변용에 지나지 않는 인상이다.

저자는 전통적 소비의식을 지탱해줬던 사회윤리가 사라지고, 개인채무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없어지는 바람에 '신용카드 제국'의 선량한 시민은 사회적으로 조장된 소비의 덫에 걸려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어디서나 통한다고 아무때나 신용카드를 내밀면 지옥문이 열린다".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지만 저자가 파헤친 신용카드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절실히 와닿는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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