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공각기동대

입력 2002-03-30 14:08:00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 '봄과 수라'는 '나라고 하는 현상(現像)은…'이란 독백으로 시작된다(미야자와 겐지는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모태가 된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쓴 일본 근대작가). '나'는 그림자같은 '현상'이다. 나는 무엇으로 증명될까. 피가 뛰는 육체? 기억? 그도 아니면 영혼이라 불리는 무엇?

참으로 마침내 영화 '공각기동대'(오시이 마모루 감독, 1995년작)가 우리 곁을 찾는다. 무사 쥬베이, 인랑에 이어 세번째 공식적으로 개봉되는 저패니메이션이다.

공각기동대는 어려운 영화다. 아무런 사전지식없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하지만 '제5원소' '코드명 J' '매트릭스' '툼 레이더' 등 수많은 영화가 베껴댄 그 감각적인 비주얼만으로도 관객들의 입이 쩍 벌어지지 않을까싶다.

서기 2029년, 급속한 과학 발달로 사이보그 기술은 정점을 맞게 된다. 신체 일부를 사이보그바디로 교체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뇌의 일부를 컴퓨터(NET)화하는 '전뇌(電腦)화'도 가능한 시대.

뇌의 일부분을 제외하면 몸 전체가 사이보그로 제작된 쿠사나기 소령. 그녀는 일본 외무성 소속 사이보그 테러진압부대 공안9과 대원이다.

'인형사'란 정체불명의 해커가 나타나 정치인이나 고위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의 두뇌를 해킹, 의지까지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자 사건 해결을 위해 쿠사나기 소령이 투입된다. 그러나 사건은 미궁속을 헤매다 어느날 차에 치여 다 부서진 사이보그가 공안9과로 실려온다.

사이보그 속에 숨어든 인형사는 자신의 망명을 수락해 줄 것을 요구한다(여기서 인형사가 영혼이 깃든 '프로그램'일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인형사는 "인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DNA도 결국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고, 기억에 의해서만 인간일 수 있다"며 생명체로 규정받고자 한다. 이때 공안9과를 습격한 테러단에 의해 인형사를 탈취당한다.

가까스로 쿠사나기 소령이 되찾은 인형사는 자신과의 '합체'를 그녀에게 제안한다. 둘이 '접속'하는 순간, 저격병에 의해 인형사는 파괴되고, 쿠사나기의 몸도 파괴된다. 마지막 장면, 어린 소녀사이보그 몸체에 이식된 쿠사나기는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라며 문을 나선다.

영화 '공각기동대'는 쿠사나기의 불안한 자의식을 빌려 사이버 펑크의 일관된 주제에 골몰한다. 기억, 정보, 경험 등 인간을 증명하는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시대에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만약 전뇌 자체가 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어야 할까" "'나'란 무수히 접속된 네트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흘러오는 정보들의 한 교차로가 아닐까".

사이버 테러를 전담하는 공각기동대의 활약이라는 평범한 액션 영화 이면에 인간 정체성의 탐구라는 깊은 존재론적 사유를 절묘하게 깔고 있는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형이상학적이며, 트집잡을 데 없는 걸작. 개봉 4월 12일.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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