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간병단이 달린다

입력 2002-03-16 14:04:00

◈할머니 간병단 인기

평균 서너명씩은 됐던 자식들 키우면서, 그리고 한평생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가면서 축적된 경험. 노인들에게 이보다 큰 재산이 있을까.

하지만 많은 노인들이 이같은 재산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경험을 풀어헤칠만한 여건이 갖춰지지 못한 때문.

이런 가운데 최근 몇몇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발휘하는 일자리를 얻고 있다. 노인.산모.아기 등 '사람 돌보는 직업'의 수요가 가파르게 늘어나면서 할머니들의 새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노인이 노인을 돌봐요

조채연(60.가명)할머니는 지난 달 평생 처음으로 직업을 가졌다. 자식 낳고 남편 뒷바라지 하면서 평생 살림만 했던 조 할머니. 할 수 있는 일이 '살림'이었고 잘 하는 일도 '살림'. 하지만 조 할머니는 최근 '살림'외에 또 한가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조 할머니는 지난 달부터 이수자(63.가명)할머니를 돌보고 있다. 지난해말 보건복지부 지정 노인자활후견기관인 운경재단 대구시니어클럽(053-422-1901)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노인 간병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교육을 받은 뒤부터다.

조 할머니가 돌보고 있는 이 할머니는 맞벌이를 하는 아들 부부때문에 낮시간엔 외톨이다. 게다가 이 할머니는 당뇨병 등 각종 노인성 질환으로 제대로 거동하기도 힘들다.

식사에다 운동, 산책, 말벗까지. 조 할머니는 오전부터 저녁무렵까지 이 할머니의 손발이자 친구가 된다.

하루 10시간씩의 대면. 일자리가 인연이 돼 만났지만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이 할머니는 이제 조 할머니에게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죽을때까지 함께 있자"고이 할머니의 입가에 웃음을 심어준 것도 큰 보람이지만 조 할머니는 또다른 기쁨이 있다. "내가 이 나이에 돈을 벌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생겨요. 아침에 일하러 간다는 것 말이에요. 남편이 벌어준 돈을 쪼개 쓰다보니 주눅들때가 많았어요. 안 겪어본 사람들은 지난 시대 전업주부들의 애환을 몰라요. 내 평생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번다는 기쁨에다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즐거움까지. 요즘은 사는게 재미있어요". 조 할머니는 신이 난다고 했다.

▨할머니 베이비시터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베이비시터의 수요가 늘고 있지만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젊은 부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애를 길러본 경험이 있어야하는 것은 물론, 아이를 자신의 손자.손녀처럼 돌볼 만큼 정이 가득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김정희(57.여.가명)씨는 이런 점에서 자신이 베이비시터로 일하고 있는 가정에서 '인정받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고민을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남매를 둔 김씨는 지난 1월부터 베이비시터로 나섰다. 돌을 갓 지낸 아기를 돌보고 있다.

아직 아기가 너무 어려 조심스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자기 자식이 아닌 만큼 더 소중하게 돌봐야한다는 부담이 큰 것도 사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하루 종일 강행군. 노동량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씨는 재미있다는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늦게나마 직장을 갖게 됐다는 노인들의 공통된 기쁨을 김씨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 이상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여자들중에 아이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지금 새로이 기술을 배울 수 없다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에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어요. 아기 돌보는 일은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 중 최고 숙련도가 높은 것이거든요".

김씨는 낮시간동안만 육아담당이지만 육아에 관한 전문가로서 아이 부모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처음 아기를 가진 부모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는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저희 남편요. 사업하면서 지금도 돈 잘 벌어요. 하지만 돈벌려고 노년층들이 직업을 갖지는 않아요. 사는 재미를 느끼려고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김씨는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가져야 노인들도 일을 멋지게 해낼수 있다고 했다.

▨내딸처럼 돌봐요

홍순영(가명.60)할머니는 '전문 산모도우미'가 될 꿈을 갖고 있다. 친정어머니 수준의 정성에다 요즘 산모들의 요구를 제대로 익히자는 것.

요즘 산모들의 가장 큰 고민은 산후에 '망가진 몸'을 복원하는 것이다. 홍 할머니는 이를 위해 시니어센터 간병단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산후체형관리.산후체조 등 산모들의 몸관리를 익혔다.

산모도우미를 필요로 하는 산모들은 대부분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신경이 더 간다. 친정어머니가 아니라서 정성이 덜하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다.

몇 주만 도와주면 산모의 몸이 회복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부담도 있다. 하지만 몇 명의 산모들을 돌봤지만 온통 칭찬 뿐이었다.

"요즘 젊은 산모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죠. 그래서 여러가지 새로운 교육도 많이 받아요. 옛날 저희가 산후조리 할 때하고는 차원이 틀려요".

곤란한 경우도 적지 않다. 산후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왔는 까닭에 '가정부'와 혼동되는 점도 적지 않은 것이다.

시니어클럽 이숙희 팀장은 "노인들을 돌보거나 산모도우미, 베이비시터 등으로 일하는 노인분들에게서 가정부와의 역할차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우리나라 가정문화상 가정에서 한가지 일만 해주기는 힘들어 여러가지 일을 덤으로 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노년층의 각종 '도우미 직업'이 정착되기 위해선 역할구분이 확실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경철기자 ko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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