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정신대 그 현장을 가다(2)

입력 2001-11-21 14:46:00

일본군이 바오샨(保山) 일대를 점령하면서 제일 먼저 위안소가 생긴 곳은 라멍(拉孟)에서 텅충(騰沖) 가는 길목에 위치한 쩐안(鎭安)가(街)였다. 처음 이곳엔 버마 출신의 위안부 4명이 있었는데 군인들끼리 경쟁이 심해 서로 싸우다 사병이 장교를 권총으로 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후 23개의 위안소들이 잇따라 생기면서 쩐안가의 위안소는 없어지고, 5월말에 도착한 12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라멍, 망(芒), 쩌팡(遮放), 텅충 등 4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천주량(陳祖樑)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룽링(龍陵) 지역에만도 8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하며, 그 중 우리가 장소와 건물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2곳이었다. 본래 천주교회였으나 일본군에게 접수된 후 빠이타(白塔) 위안소로 사용됐던 건물은 1958년까지는 보존돼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서 룽링현(縣)의 향기국(鄕企局:농촌진흥청 같은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곳은 42년 6월 일본군 제 56사단 제 113연대가 주민 티엔(田)씨의 저택을 강제로 빼앗아 위안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가운데 마당이 있고 정방형으로 이어진 이층 목조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이곳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 그리고 동북부 출신의 중국인 위안부가 20~30명 있었다고 한다. 작년까지는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기둥이 기울어진 채 잡초만 무성한 폐가가 되어 있었다.다음날 4시간쯤 다시 산길을 달려 도착한 텅충에는 본래 한 면이 1㎞에 이르는 정사각형의 성벽이 있었다고 하며, 천선생이 시가지 한가운데서 당시의 남문위치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연합군과 일본에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텅충성(城)은 폭 2m , 높이가 5~6m로 그 성이 전쟁통에 다 부서지고 성내에 집은 한 채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집들은 모두 1976년 이후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고 했다.

텅충에서 우리는 위안소 터나 건물을 4곳 확인할 수 있었다. 성안에 있었던 한 곳은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안의 2층 목조건물로 당시로선 꽤 큰 건물이었다. 다른 한 곳의 위안소 터엔 지금 여관과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성 밖 순청(順城)가(街)에 있었던 한 위안소는 본래 이 지역의 대지주였던 차이(蔡)씨의 집으로 지금은 예순 한 살의 둘째아들이 수리하여 살고 있었다. 역시 가운데에 마당이 있는 2층 건물로 1·2층 합쳐서 방이 24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장교 전용 위안소로 조선인 위안부만도 20여명 있었다고 하며, 군인들이 교대로 24시간 지키고 있어서 감옥이나 다름없이 감금된 상태였다고 한다.

다음날 텅충에서 남서쪽으로 좀 떨어진 허화(荷花) 위안소에서 우리는 당시의 증인 한 사람을 만나 소중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마을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14살의 소년이었던 인페이잉(尹培榮) 할아버지는 한 살 위의 다른 소년과 함께 일본군인들과 이곳 위안소의 여자들에게 하루 두 번씩 밥을 지어 날랐다고 했다. 당시 예방접종을 실시한다고 하자 주민들이 다들 무서워서 도망갔지만 인(尹)소년은 호기심에 나섰다가 일본군인들에게 붙들려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는 그는 지금도 그때 일본군인들이 아침 점호시간에 부르던 군가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불러보였다.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 위안부들은 몇 명이 한 방을 쓰면서, 군인들이 부르면 그곳에 가서 상대를 하기도 했다고 했다. 하루종일 군인들의 감시하에 갇힌 채 살아야 했던 그녀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여하튼 중국군 6만4천명, 일본군 2만2천명의 전사자를 내며 2년8개월이나 계속된 바오샨 지구의 전쟁에서 포로가 됐던 위안부는 모두 스물 대여섯명, 그 중 칠할이 조선인 위안부들이었을 만큼 당시 일본군의 성적 희생물로서 조선인 여성들이 입은 피해는 유난히 컸다. -안이정선(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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