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왕자태실과 관련 풍수지리학적 명당에 대한 기록과는 별도로 민간에는 성주(星州) 이씨의 선조(先祖)인 이장경묘의 이장과, 홍윤성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세조의 가봉비에 얽힌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먼저 태실이 있는 태봉에 이장경의 무덤이 있었는데 후손들이 묘를 쓸 무렵 노 스님이 지나가면서 "명당이구나"는 소리를 하여 마침 장례를 치르던 상주가 쫓아가 여쭈니 "저 큰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자손이 잘 될 것이나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서는 안될 것이다"고 말해 이를 따르니 아들 5형제가 모두 큰 벼슬을 하고 자손이 번창하였다는 것.그런데 자손들이 스님의 경고를 잊고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누각까지 세우자 명당자리라는 소문이 서울까지 알려져 결국 왕실의 태실자리로 빼앗겼다는 것. 또 이장경의 장례식때 현재 태실을 가리키며 나무를 베고 12개의 관으로 깊이 묻어 묘를 쓰라고 했으나 후손들이 이를 지키지 않고 11개 관만 묻어 결국 이장되는 불운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다.
또 태실과 관련 세조의 가봉비(임금이 된 후 왕의 태실임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비)에 대한 기록도 역사적 사실을 기초하기보다는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라고볼 수 있다. 세조의 가봉비는 세조.예종.성종에 이른 3대에 걸쳐 벼슬하면서 권세를 누렸던 홍윤성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카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와 홍윤성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퍼붓고 돌로 찍고 해서 거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닳았다는 것이 주 내용.
그러나 사실은 가봉비에 홍윤성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실제 비석을 세울때 주무관청인 예조의 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조선시대 전국의 태실은 시위품관 등 이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 백성이 훼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는 유교적인 윤리의식에 팽배한 당시 사회분위기가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 홍윤성을 폄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단종을 위해 희생된 사육신은 만고의 충신으로 받들어진 반면 세조를 도와 왕조의 기틀을 다졌던 인물들은 민간의 전설이나 야사에서 대부분 나쁜 인물로 묘사된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성주.박용우기자 yw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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