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업의 근간이자 최후 보루이기도 하며, 우리 치수(治水)와 기후에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쌀 농사'가 드디어 마지막 벼랑에 섰다. 농림부의 29일자 대책 발표는 대책이기에 앞서 그런 위기를 국가가 나서서 인정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농민들의 동요 = 경북지역 농민들도 이미 고비가 눈 앞에 닥쳤음을 실감하고 있다. 심지어 가공 회사(RPC)들조차 재고 문제에 부닥쳐 고민 중이다.
농민회 전북 도연맹은 농림부 발표가 있기 전이던 지난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쌀 위기를 해소하려면 2004년 WTO 재협상에서 관세화를 막고 수입량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읍의 정우농민회.한농련.여성농민회 등 300여명은 같은 날 쌀값 보장, 추곡 전량 수매 등을 요구하고 "올해 수매가가 작년보다 적어질 경우 연말 영농자금을 현물로 상환할 것"이라며 시위를 벌이고 대정부 투쟁을 천명했다.
정읍 이평농민회도 오는 30일 궐기대회를 준비하면서 다른 지역 농민회 등과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쌀 문제에 전라도 농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경북 역시 전국 둘째가기 서러워할 큰 농도(農道)이지만 과수 등 특작 비중이 높은 것과 달리, 전라도는 쌀 농사에 농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농협도 "이젠 못해" = 수매를 통해 쌀값을 조절하는 것은 국가의 업무이지만, UR 규정 때문에 갈수록 수매량을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될 때 나머지 수매를 담당해 줄 정부의 '대리인'이 농협 RPC(미곡 종합처리장)들이다.
하지만 농협 RPC들도 최근엔 뒤로 드러누울 태도를 보여 왔다. 경북지역 RPC들도 얼마 전 칠곡에서 모임을 갖고 올 가을 수매 축소 혹은 포기와 정부 지원 확대를 요구한 바 있다.
충남지역 RPC 운영협의회도 지난 25일 회의를 갖고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없으면 쌀 수매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지금까지는 정부 수매분 이외에는 희망 전량을 RPC들이 수매해 왔으나 이제 쌀값의 계절 진폭이 거의 없어져 조합당 평균 2억여원의 결손을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북지역 농협 조합장들도 최근 회의를 열어 "쌀 긴급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올 가을부터는 수매를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농림부 발표 = 상황이 급박해지자 경북.충남.충북.전북 등 도청도 쌀값 안정 대책을 나름대로 마련해 농림부에 지원을 건의했다. 또 민주당 등은 다음달 7일 국회에서 '쌀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토론회를 열어 쌀값 하락에 대한 국회 차원의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이런 기관.단체에서는 농민들 동요 이외에도 쌀값이 갈수록 위태로와지고 있는 점 역시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쌀값은 가마(80㎏)당 전라.충청.강원 지역 경우 16만8천∼17만2천원으로 작년보다 최다 1만2천원 가량이나 떨어졌고, 수도권은 17만5천원 안팎으로 6천원 가량 하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29일 나온 농림부 대책은 이런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때문일 것이다. 이날 배포된 자료는 우선 올해 쌀 수매량을 작년보다 늘리고, 정부가 못하는 이 일을 농협이 대신 하도록 RPC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수매량은 1999년 1천145만섬, 2000년 1천164만섬이었으나 올해는 1천325만섬을 사들일 계획이다. UR의 의무 축소 규정에도 불구하고 작년보다 오히려 160만섬 늘리겠다는 것.
그 중 575만섬은 국가, 550만섬은 RPC 몫, 200만섬은 농협 몫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농협 몫 200만섬이 올해 오히려 증가할 내용으로, 이는 수탁 판매 혹은 시가 매입.방출제로 운용하려는 것이다. 그 대신 RPC 등에는 보다 유리한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평가와 전망 = 29일 농림부 발표를 다시한번 뜯어 보면, 올해는 농협을 주력으로 내세워 쌀값을 유지하겠다는 심산임이 금방 드러난다. 그러면서 이는 시장경제 원리에 쌀을 맡김으로써 쌀 농업이 그 자체로 점차 경쟁력을 키워갈 수 있게 하기 보다는 임시로 문제를 덮어 보겠다는 것임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근본적인 대책은 못되는 것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내년 선거를 의식해 정부가 지나치게 쌀 시장에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고 있다.
더우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도 않아, 3년 후엔 UR협상이 부여했던 쌀 시장 폐쇄 연장기간도 끝나게 돼 있다. 추가 협상을 통해 폐쇄 기간을 더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 봤자 그 역시 임시 방편 이상은 되기 힘든 대책일 뿐이리라 판단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멀잖아 3년 후의 그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총체적 쌀 농업 대책을 내놓겠다고 29일 약속했다. 그러나 또다시 임시 모면적이고 눈가림식으로 제시돼서는 우리 쌀농업이 경쟁력을 갖춰 갈 기회조차 박탈하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우려이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