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33년째 구두닦이 강재원씨

입력 2001-07-23 14:56:00

죄 없는 사람도 그 앞에 서면 왠지 주눅들기 십상인 곳, 대구지방검찰청. 그러나 그 찬바람 도는 장소를 일터로 삼아 23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들락거리는 사람이 있다. 구두닦이 아저씨 강재원(49)씨. 그는 검찰청 본관과 법정 사이의 주차장 한 귀퉁이에 앉아 구두를 닦는다.

검찰청은 철저하게 법과 계급이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강씨는 특혜(?)를 받는 사람이다. 건물내 출입자들이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아야하는 것과 달리 그는 검문없이 통과한다. 그의 얼굴은 주민등록증의 13자리 번호보다 더 확실한 증명서가 되는 셈이다. 마음씨 좋은 현관 경비원은 그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오전 11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강씨는 하루에 10 번 이상 검찰청 건물을 오르내린다. 한 번에 9켤레에서 13켤레까지…. 깨끗이 닦은 구두를 들고 사무실 내 주인의 자리에 갖다 둔다. 내려오는 길엔 다시 내놓은 구두를 챙겨 든다. 검찰청 내 그의 정기 고객은 얼추 100명. 한사람당 매월 1만 5천원, 일요일을 빼고 매일 닦는다.

한 번에 어떻게 구두를 13켤레씩이나 손에 쥘까 싶지만 검찰청 구두닦이 아저씨의 창의성은 보통을 넘는다. 그는 중국집 배달부들의 철가방을 구두 배달가방으로 쓴다. 문을 떼버리고 철가방 내부 3층에 6켤레, 철가방 바깥의 양쪽에 고무줄을 달아 두 켤레, 손잡이에 또 한 켤레를 걸친다. 나머지는 다른 손에 부채모양으로 요령껏 펼쳐 든다.

"15년 전에 칠성시장에서 1만원 주고 샀어요". 어떻게 음식 담는 철가방에 구두 담을 생각을 했느냐는 말에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으로 답한다. 여기저기 찢어져 철사로 얼기설기 기운 철가방은 그의 구두닦이 세월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에 지독하게 말수 적은 강씨는 그냥 웃을 뿐이다. 그의 웃음은 '뭐든 깁고 닦아 쓰는 게 세상사는 이치'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는 고아였다. 3세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들었을 뿐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아원에서 도망친 그는 공원생활을 잠시 했고 곧 구두닦이가 됐다. 16세에 시작한 구두닦이는 올해로 33년이 된다. 언제 다쳤는지 모르는 한쪽 눈은 어려서부터 시력이 없다. 그 눈에 세상은 언제나 뿌옇게 보일 뿐이다.

강씨는 한때 청소년회관에서 경비 겸 청소부로 일했고 그때 결혼했다. 월 4만원짜리 청소부 가장을 불쌍히 여긴 청소년회관측과 검찰청측이 그를 이곳 검찰청 전속 구두닦이로 임명해준 것이다. 아들딸을 낳고 열심히 살던 그에게 또 한번의 상처는 11년 전 아내와의 헤어짐. 강씨는 7살, 11살짜리 두 아이를 혼자 키웠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아내의 빈자리도 구두를 닦는 마음으로 정성들여 닦고 기웠다강씨의 얼굴은 희고 손은 곱다. 작고 예쁜 손은 구두약도 묻어 있지 않다. 그에게서 하루에 100켤레나 구두를 닦아내는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구석구석 빠르게 헤집는 솔질에도 구두약은 좀처럼 손에 묻지 않는다.

'구두를 보면 구두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데…' 강재원씨는 그 말에 고개만 설레설레 흔든다. 그 모양이 구두는 그저 구두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구두를 닦을 뿐 쓸데없이 옆으로 눈길을 두는 법이 없다. 검찰청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갖가지 아픈 사연을 품고 있을 테지만 강씨는 그들의 얼굴을 살피지 않는다. 재판을 끝내고 법정을 나서기가 무섭게 싸우는 사람들, 실형 선고에 포승줄에 묶인 채 주저앉아 흐느끼는 사람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강씨는 23년 동안 여기서 구두를 닦았지만 검찰청 직원들과 소주 한 잔 마신 일도 없다."구두 닦는 일만해도 바빠요". 강씨는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닦고 기워야 할 사연이 있다는 말을 그렇게 에둘러 했다. 누군가 벗어두고 간, 바닥에 구멍난 낡은 갈색 구두 한 켤레. 더 이상 신기 어려워 보이던 갈색구두는 강씨의 손을 거쳐 금세 반듯하고 윤기나는 구두로 변한다.

"이렇게 깁고 닦으면 무엇이든 쓸만한 물건이 되는 법입니다". 강씨는 깨끗이 닦은 구두를 가지런히 내려 놓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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