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4월, 고교 2학년 까까머리 단발머리 그들은 대구를 누볐다. 숱한 학교를 다녔고,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뉴스와 정보와 이야기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남에게 알린다는 즐거움, 몇 사람만의 것을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행복에 마냥 달리고 달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났던 것이 대구의 청소년 대상 월간지 '파로스'. 모험이었고 실패가 예견됐지만 무려 6호까지 발간했다. 당시 편집국장을 맡았던 손태윤(경북대 인문사회 자율전공)군은 "이탈리아 어느 등대의 이름을 딴 제호에 걸맞게,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대구 청소년 문화에 빛을 던져보자는 시도였었다"고 했다.
청소년 문화 운동에 뜻이 깊었던 우남길씨라는 분이 주도한 이 잡지는 고교생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스레 그들 스스로 취재하고 제작하는 형태가 됐다. 아마추어 냄새가 역력했지만 청소년들과 가장 가까운 현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씌어지다 보니 이내 소문이 났다. 제작진이 70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앞 서점을 돌며 판매를 부탁해야 하는 유통상의 한계가 큰 문제였다. 온전한 경영까지는 이뤄내기에 무리였던 모양. 우씨 등이 사재를 털기도 했지만 한계는 금세 왔다. 그해 10월호가 끝이었다.
그런 중에 고3이라는 이름으로 다급한 현실까지 다가 왔다. 그 여남은 명은 공부를 위해, 대학 진학을 위해 흩어져 가야 했다. 서로의 존재와 약속을 다시 떠올린 건 수능시험을 치르고 난 뒤. 그리고 이번엔 대구 청소년 자원봉사센터 조여태씨가 그들을 다시 모이도록 만들었다. "작년 11월 우연히 '파로스' 멤버였던 한 자원봉사자 이야기를 듣고 옳다구나 싶었어요. 자원봉사·문화·생활 등을 포괄하는 청소년 전문 웹진을 만들 구상을 갖고 있었으나 제작진 구성이 쉽잖았거든요".드디어 올해 4월. 다시 모인 그들은 새 출발의 기쁨에 들떠 있다. 청소년 전문 웹진을 만드는 '대학생 기자단'을 구성해 낸 것. 조씨의 부름을 받은 그들은 금세 달려 왔다. 까까머리 단발머리 고교생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스무살 어엿한 대학 신입생이 돼 있었다. 그것 말고는 변한 게 없었다.
열정도 마찬가지. "그때나 지금이나 대구의 청소년 문화는 등대 하나 없는 캄캄한 바다와 다름 없는 것 같습니다. 갈곳을 못찾고, 놀 만한 거리조차 찾지 못한 중고생들은 지금도 거리를 배회합니다. 그들과 함께 갈 곳, 함께 놀 거리, 함께 생각해 볼 문제들을 찾아 나갈 겁니다". 이번에 부국장을 맡은 김유리(영남대 사회과학부)양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흐르고 있었다.
일도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기자단 14명이 선발됐고, "일은 못 해도 일할 분위기 만드는 데는 고수"라는 손군이 다시 편집국장 자리를 강요 당했다. 2개팀으로 나눠 격주로 웹진을 제작할 계획. 자원봉사 센터는 웹디자인을 맡아 줄 중고생 12명, 학교 현장에서 활약할 리포터 60명 등으로 지원팀도 꾸렸다.
어려움이 없을리야 없는 일. "준비는 잘 됐는데 막상 취재에 들어가니 죽을 지경이에요. 맘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모두들 시간도 잘 안 맞고 해서 더 이상은 진도가 안 나가 애가 탑니다". 1팀장 김충탁(영남대 영문과)군이 하소연을 하자, 옆에서는 "팀장 된 티를 낸다"고 놀렸다.
그러나 사실인듯 했다. 'YMCA 녹색가게' 취재만 해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아직 이뤄내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엔 엉뚱한 곳을 찾아가 허탕을 쳤고, 어렵사리 장소를 알아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 문이 닫겨 있었다는 것. 그래서 14일에 창간 1호를 내려 했으나 무산됐다. 2호 제작을 맡은 2팀장 장정엽(경북대 경제통상학부)군도 막상 일을 벌이려니 두려웠던지 안도해 했다. "한 주 벌었다!"
기자가 들여다 봐도, 아직 인터넷 도메인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사이트 구성도 제대로 기획되지 못했다. 취재와 기사 작성이 다 끝난다 해도 언제 인터넷에 첫선을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인듯 했다.
그래도 그들은 발랄했다. 젊음의 특권인가? "대학생 되니까 좋던데요? 중고교를 찾아 가니 손님 대접을 해줍디다. 전에 고교생으로 잡지 만들 때는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는데… 이번엔 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벌써 한 유선방송 대학생 기자 역할도 맡았다는 김상훈(영남대 사회과학부)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자가 취재를 끝낼 때 쯤 되자 그들은 뭔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저녁에 동성로에 취재 나갈 일을 의논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학교 학생일까 고교 시절 내내 궁금했던 교복을 주제로 삼았다는 얘기. 교복을 하나하나 촬영하고 특징을 찾아내 소개할 참이라고 했다. 예능에 일가견을 가져 입학 하자마자 대학 그룹사운드 보컬에 뽑혔다는 김병준(영남대 생물자원학부)군은 "교복들을 만화로도 그려 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웹진 성격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자가 슬며시 물어 보자 청산유수 대답이 돌아 왔다. "심각하고 골치 아픈 기사는 되도록 삼가려 합니다. 가벼운 것들이라도 함께 모여서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주위의 참여도 무제한 받을 생각이에요. 많이 모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잖겠습니까?"
꾸밈 없는 그들의 푸른 미소 뒤로 땀과 꿈이 구석구석 녹아든 청소년 웹진의 한 페이지가 그려지고 있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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