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침체 넘어 '공황'

입력 2001-01-08 00:00:00

경산 진량공단에서 10여년째 설비기계 제조업을 하는 김모(47)씨. 연간 매출액 100여억원에 뛰어난 기술력으로 비교적 '알짜기업'을 경영하는 그이지만 최근 속이 끓는 일을 겪었다. 석달 전 신규 투자를 하려고 거래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다가 과다한 담보 요구의 벽에 부닥쳐 결국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은행 창구는 꽉 막혀 있었다. "지역에서 기업이 10억원 대출받는 일이 서울에서 100억원 이상 대출받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금 여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향토 금융기관이 줄초상이 났기 때문이죠. 사업을 정리하고 투자이민이라도 가자는 자조적 얘기가 기업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돌 정도입니다"

한국 경제가 전반적인 침체 상황이라고 하지만 대구·경북지역은 공황이라고 부를 정도다. 아무리 가도 끝이 없는 캄캄한 터널에 갇힌 느낌이라는 게 기업인들의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통계지표는 그러한 참담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99년도 대구의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는 632만3천원. 9년째 전국 16개 시·도에서 꼴찌다. 대구의 생산적 기반이 완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전국 총 GRDP 중 수도권(서울·경기)이 차지하는 비중이 64%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기형적 경제력 편중과 지방의 경제적 피폐상이 어느 정도 심각한 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대구상의가 지역 기업인들에게 올해 1/4분기 체감적 경기전망(BSI·기준치 100)을 물어보니 37로 나왔다. 대한상의가 72년 이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것이다. 서울 77, 부산 55, 광주 67, 울산 72와 너무 큰 격차다. 그만큼 대구 기업인들은 올 대구 경기를 절망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1월 기준 대구지역 어음부도율(금액기준)은 2.06%로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한 지난 81년 이후 가장 높았다.

실물 경제는 더 암담하다. 아파트 전문업체로 전국에 이름을 날렸던 우방(법정관리 신청), 보성(법정관리 기각), 서한(법정관리 절차), 청구(법정관리)가 줄줄이 쓰러진 후 건설시장은 찬바람이 불고 있다. 살아남은 몇몇 업체들도 명맥이나마 잇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서울 대형업체들이 민·관급 현찰공사들을 싹쓸이해가는 것을 구경만 할 뿐이다. 삼성그룹 건설계열사들의 경우 지난 98년부터 3년 동안 대구시종합건설본부가 발주한 4천여억원의 공사 중 34%(금액기준)를 몰아갔다. 외지 업체들이 대형공사를 따내가면 자금의 역외 유출은 물론 지역 업체들과 수천여명의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이 그만큼 일거리를 잃는 셈이다.

한때 수출 효자 산업으로 불려졌던 섬유산업은 어떤가. 동국무역, 갑을, 금강화섬, 대하합섬 등 간판급 기업들이 IMF 사태 이후 워크아웃, 부도 등으로 정상적인 경영을 하지 못하거나 흔적없이 사라졌다. 장해준 대구경북견직물조합 상무는 "수출 경쟁력이 갈수록 나빠져 일부 업체들이 15~20% 정도 생산량을 줄여 출혈 경쟁을 자제하고 있으나 대부분 업체들은 원리금 갚는 것도 바빠, 물량을 줄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실상을 전했다.

자동차 부품 산업 역시 삼성상용차와 대우 사태의 여파로 상당수 업체들이 부도를 내거나 조업을 중단했다. 최대 부품업체인 한국델파이는 자금줄이 막혀 흑자도산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고 있으며 삼성상용차 퇴출로 인해 220여 협력업체가 설비 투자 손실은 물론 휴지조각 어음을 붙잡고 통곡을 하고 있다. 이미 6, 7개 업체는 기계를 돌리지 못할 지경이다.

상권은 이미 대기업과 외국자본의 각축장으로 변해 버렸다. 향토기업인 화성산업·대백의 입지는 좁아질대로 좁아졌고 재래시장, 상가까지 이들 대기업의 유통시장 잠식에 손님을 뺏겨 아우성이다. 화성산업·대백이 워크아웃으로 손발이 묶였을 때 롯데는 포항의 화성산업 백화점 예정 건물과 대백 상인점 부지를 인수해 영업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또 월마트는 대백의 수성구 시지동 할인점 부지를 사들여 할인점을 개점했다.

현재 대구에는 홈플러스, 까르푸, E마트, 롯데 마그넷 등 6개 대형 할인점이 이미 상권의 상당 부분을 잠식한데 이어 올 상반기까지 6, 7개 매장이 더 들어설 예정이어서 지역 상인들의 위기감이 폭발 직전이다. 실제 지난해 외지 대형할인매점들은 대구에서 6천억원을 쓸어갔다는 얘기이고, 대형매점이 더 늘어나는 올 해는 그 액수가 1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업계의 예상이다.

대형 할인점 진출로 서문·칠성 등 재래시장과 중앙·대신지하상가, 골목 슈퍼마켓 등은 매출이 급감,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칠성시장에서 과일도매상을 하는 정현달(33)씨는 "4년째 매출이 계속 줄고 있다"며 "경기가 어려워진 이유도 있겠지만 시장을 찾는 손님들을 쓸어가는 대형 할인점이 결정타"라고 말했다. 대구 북구 침산동 한 아파트 단지내 슈퍼마켓 주인 이모(45)씨의 푸념이다.

"2년 전 어렵사리 점포를 마련해 장사를 시작했으나 가까운 곳에 홈플러스가 있어 손님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차량이 줄을 이은 홈플러스를 지날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궁여지책으로 오뎅·순대를 팔아 겨우 버텨가고 있습니다"

전국 3대 도매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 상가연합회를 중심으로 시장축제, 주차빌딩 조성 등 피눈물나는 자구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대형 할인점 진출과 불황 여파로 매일 마수걸이조차 못하는 점포가 많다.

대구 경제의 몰락은 단적으로 금융기관의 황폐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IMF 태풍으로 영업정지와 인가취소를 당한 금융기관이 꼬리를 물면서 지난해 10월말 현재 지역 금융기관 점포는 1천873개로 감소했다. 98년말 2천40개, 99년말 1천906개에서 계속 줄고 있는 것이다.

박의병 대구상공회의소 조사부장은 "지역 경제의 3대 축인 건설·섬유·자동차 부품산업이 붕괴 조짐을 보이고 소비까지 위축돼 회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며 "첨단산업을 유치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나 이마저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지방 역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기류를 타고 급속히 진행하는 경제력의 중앙집중으로 무참하게 침몰하고 있다. 지역마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김교영기자 kim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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