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 이야기6-한국열풍과 '조국'

입력 2000-12-29 14:16:00

'항일 파르티잔 홍범도'. 알마아타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 '크즐오르다'를 순회 진료차 찾았다가 초라한 동상 하나를 만났다.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 봤던 바로 그 항일투쟁의 용장 홍범도 장군은 거기 그렇게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 늠름했던 독립투사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그러나 홍장군 역시 알고 보면 그 많은 강제이주 동포 중 한 사람이었다.

이곳에 열었던 병원을 찾은 이주 1세대들은 진료와 무관하게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유 모를 뭉클함이 굽이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같은 핏줄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은 그들이 쏟아내는 한맺힌 절규 뿐만이 아니었다. 입에 맞지 않는 장국, 짠 김치, 얼큰하게 술 오른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 어디에나 한민족의 피가 묻어 났다.

크즐오르다에는 강제이주 동포들이 1세대부터 2, 3, 4세대까지 폭넓게 살고 있었다. 그곳 시르다르 강변에서 동포 청년들과 보드카를 마시며 나눴던 대화는 지금도 필자의 기억 한 구석을 맴돈다. 밤새워 그들이 쏟아냈던 말은 결국 '조국'이었다. 먼 이국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조국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10여일 간의 짧은 크즐오르다 순회진료를 마치고 떠나던 날, 공항까지 배웅 나왔던 동포 할머니들의 눈에 맺히던 눈물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카자흐는 사회주의 적부터 침구치료가 폭 넓게 이용돼 그 연구도 활발했다. 한의사를 '침구의사'라 부르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였다. 각 병원마다 침구의사들이 배치돼 있었고, 한방 치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120여 가지나 되는 민족들이 이루는 형형색색의 환자 물결, 이질적인 언어와 행동 등은 필자에게 낯설었지만, 성실한 2명의 간호사와 사할린에서 온 동포 통역원 등이 진료활동을 많이 도와줬다.

호응도 갈수록 높아져 환자가 계속 늘었다. 다만 약재와 소모품이 너무 부족한 것이 답답했다. 한방 특성상 약재는 현지에서 구할 수도 없었다. 이때문에 필자를 믿고 찾아온 동포들을 돌려 세워야 할 때는 가슴이 저리다 못해 따가운듯 했다. 알마아타에만도 1만6천여명이나 되는 동포들이 살았다. 그러나 동포라고 해서 그들에게만 특별한 진료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 안타까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기름지고 짠 육식 위주의 식생활, 건조한 날씨, 석회질 많은 식수 등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은 관절 질환, 고혈압, 심장병, 위장병, 간 질환, 신장 질환 등 무척도 많은 병을 갖고 있었다. 의사에 대한 불신도 각종 질환을 만성화 시키는데 단단히 한몫 하는듯 했다.

고맙게도 카자흐엔 한국 열풍이 대단했다. 한국어, 한국 음식, 한국 제품….

태권도도 그 중 하나였다. 러시아권엔 전통 운동이나 무술이 별로 없어 태권도 확산의 기반이 된듯 했다. 지방 곳곳에까지 도장이 생겨날 만큼 현지의 태권도 열기는 뜨거웠다. 한국 대사관 주최 태권도 대회도 열리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사범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를 간파한듯 북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범을 파견, 중앙아 각국에 태권도를 전파하고 있었다.

필자는 1996년부터 매주 한차례씩 국립 경찰대학을 방문, 경찰 예비간부들을 진료하곤 했다. 그 경찰대학에는 한국의 태권도 사범이 파견돼 있었다. 배가 볼록 나온 대학 의무실장 '유라'는 태권도와 한의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태권도 심취는 다분히 살을 빼겠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외국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한국어 구령은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불안한 마음과 26시간(차질 없이 비행하면 10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했던 황량한 스텝의 나라 카자흐.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들, 풍부한 지하 광물자원, 세계 3위를 자랑한다는 석유 매장량, 약 120여 민족들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 도시화 정책으로 유목문화를 잃어 가는 나라, 양고기 꼬치구이 '샤슬릭' 장수들이 도시 곳곳에 화덕을 피우고 손님을 기다리는 곳.

비능률과 기다림에 익숙해져 버린 답답한 사람들, 소련 붕괴 이후 닥친 극심한 경제난, 그 대단한 인플레, 그런 것 때문에 치안 문제가 심각해진 나라, 초원과 만년설… 카자흐을 소개하는 낱말들이다. 한국과는 별관계 없으리라 생각했던 거기에 12만명의 강제이주 고려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자손을 이어가며 사막에 물꼬를 트고 벼를 심어 카자흐에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놓고 있었다.

톈산산맥의 하얀 만년설을 바라보며 진료실을 지켰던 짧잖은 시간 5년이 지났다. 현지인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동포들의 삶과 아픔을 피부로 읽으며 보냈던 시간, 필자의 얼굴도 몰라보게 카자흐 사람들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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