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生卽死 死卽生

입력 2000-12-25 14:01:00

저물어가는 2000년은 남북관계에 있어 어떤 한 해였는가. 그것은 냉전의 마지막 외딴 섬 한반도에 비로소 '평화'가 현실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다진 해였다. 그럼으로써 그 역사를 추진한 주인공에는 이 겨레로선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이 수여된 한 해이기도 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남으로써 '통일'이 앞당겨진 것은 아니다. 두 정상이 의전절차상의 모든 예우를 갖춰 남북 권력체계의 실체를 상호인정하고 무력통일도, 흡수통일도 하지 않기로 다짐함으로써 통일의 길은 현실적으로 그만큼 멀어진 것이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정상회담 이전엔 가까이 있었던 통일에의 길이 정상회담 이후 갑자기 멀어진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먼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에 젖어 착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 비로소 통일이란 험난한 먼 길임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대신 가까워진 것은 한반도에 평화가 열릴 수 있는 전망이다. 상호의 실체를 인정하고 불가침의 의지를 확인하고 상호교류와 협력을 정상의 수준에서 확약했으니 분단된 한반도의 기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큰 역사요, 2000년의 획기적인 이벤트이다.

분단 독일이 30년전에 이룩한 일을 분단 한국은 30년 뒤늦게 이룩한 셈이다. 늦은 것이 그러나 큰 문제는 아니다. 빠르고 더디고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올바른 길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분단국이 가야할 바른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지난 주 통일독일의 모습을 일주일 남짓 둘러보았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구축의 현장을 취재한 사람으로선 허허벌판이었던 동베를린의 포츠담 광장이 통일 수도의 중심번화가로 둔갑을 하고 제국의회의 폐허도 말끔히 때를 벗고 연방의회의 유리궁전으로 변모한 모습을 본다는 것은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라인강변에 자리잡았던 '본 공화국'의 지난 50년을 회고해본다면 어려운 고용불안과 소란한 극우과격파가 위협하는 '베를린 공화국'의 어수선한 출범은 통일 독일의 미래에 일말의 불안을 일게도 한다.

10년전,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 먼저 통일되었을때 나는 그것이 한국을 위해 '계몽적 의미'를 갖는 역사의 축복이란 말을 여러 사람에게 했다. 그것은 우선 통일지상주의자, 통일환상론자에 대해서 어떤 말로서도 설득할 수 없었던 진실을 실제상황으로서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분단시대가 결코 절대 악이 아니요,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이 곧 절대선이 아니라는 진리를!

모든 불행, 모든 부정을 분단상황에 책임 전가하는 것은 통일만 되면 모든 불행, 모든 부정이 말끔히 불식되리라고 믿는 것 만큼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독일민족의 1천여년 역사에서 지난 50년동안 분단된 서독의 '본 공화국'시대처럼 정치적.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도의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시절이 없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에는 많은 독일친구들도 동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1990년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한 것이 아니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처음부터 독일의 '통일'이 아니라 동서독 및 동서유럽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1990년의 통일은 동독의 시민이 "우리가 곧 인민이다"는 기치를 들고 공산정권을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밑으로부터 붕괴시킴으로써 결과된 것이다. 통일은 '소원'해서가 아니라,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뜻밖에' 기적처럼 독일을 '기습'해온 것이다.

동방정책의 추진으로 통일을 포기한 독일은 통일되고, 50년을 하루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부르고 있는 한국은 분단된 채 있다.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충무공의 명언 그대로이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최정호(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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