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만주벌판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보러 오는 외국 관광객은 연간 1만명에 이른다. 한국인이 대부분이지만 일본이나 미국·유럽 사람들도 꽤 있다. 중국은 외국인의 경우 3달러를 내야 입장시킨다. 그들 돈으로 연간 23만위안. 지안(集安)시장 연봉이 1만위안 정도니 그들이 쏟는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유적은 우리 것인데 돈은 저들 몫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이 번다'는 속언이 딱 들어맞는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우리의 최대·최고 역사서로 불리는가. 대왕비는 크게 건국신화, 영토확장, 수묘인에 관한 세 부분으로 나뉘지만 좀 더 큰 분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고구려 전문가 김용만(고구려의 발견 저자)씨는 "대왕비는 허사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동양 최고의 금석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광개토대왕비를 말할 때 그것이 일본에 의해 왜곡됐느냐 아니냐는 것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 왔다.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는 일본이 비문을 왜곡한 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강력하게 제기했다. 일본참모부에서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로 새겼다는 것. 광개토대왕비문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사카와 카게노부'라는 일본군 첩보 중위. 그가 전한 비문의 내용은 정식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이것은 진짜 탁본이 아니라 임의로 문자를 판독한 뒤 종이를 대고 글자 주변을 선으로 그리거나 이미 한 탁본을 대본으로 복사하는 것.
탁본하는 사람이 그 글자를 보고 나서 그리는 과정에서 명확하지 않은 글자는 얼마든지 고치거나 가필이 가능하다.
일본은 왜곡한 광개토대왕비문을 토대로 조선 침략을 정당화했다. 4세기에 이미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사실이 대왕비에 나와 있으니 다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뒷받침 해준다. 그러나 중국·한국의 사학자들은 광개토대왕비를 허무맹랑하게 해석한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탁본은 중국 당국에 의해 전면 금지돼 있는 상태. 지안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탁본은 1928년의 석회탁본이다. 서길수 교수는 "중국 당국이 최소한 지안박물관에는 현재 상태의 정탁본을 전시해야 하는데도 일제시대의 석회탁본을 전시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존하는 탁본은 초기 원석탁본, 쌍구가묵본, 석회탁본, 석회가 떨어져 나간 뒤의 원석탁본 등 크게 4종류 20여종.
쌍구가묵본은 붓글씨로 쓴 것처럼 깨끗하다. 중국은 1981년 석회를 거의 벗겨낸 상태에서 탁본을 했다. 이를 주운대 탁본이라고 한다. 여기에 보면 석회탁본과 분명히 차이가 드러난다. 쌍구가묵본의 왜만웨궤(倭滿倭潰-가득찬 왜군이 성을 깨뜨렸다)가 주운대탁본의 왜구대궤(倭寇大潰-왜구가 크게 깨졌다)와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의 시차를 둔 탁본이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일본이 비문을 왜곡했다는 사실은 이런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석회탁본(石灰拓本)이란 글자와 글자 사이에 고르지 못한 공간들을 찾아 석회를 평평하게 바름으로써 종이를 비면에 반듯이 대고 먹으로 칠하여 글자무늬를 돌출시키는 방법. 한때 가장 유행한 방법이었으나 석회가 떨어져 나가면 다시 바르고 하다 보니 비문과 탁본 사이, 탁본과 탁본 사이에 오차가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비문 조작 논쟁으로 이어졌다. 전혀 별도의 글자를 새겨 넣고 탁본을 찍어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비문이 일본에 의해 왜곡된 것만은 아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인에 의해 훼손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나라가 이 비를 보았을 것은 기정사실. 중국인의 자존심이 깔아뭉개지는 내용을 그대로 뒀을 리 만무하다이제 관심을 대왕의 높은 뜻과 업적답게 넓혀보자. 우리의 고구려 연구는 지나치게 일본의 비문 왜곡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일들이 비문에 담겨 있다.
대왕비에는 백제, 신라, 일본은 물론 모용선비, 거란, 숙신, 동부여에 대한 정벌 기록이 나온다. 이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모용선비족의 나라인 후연과의 오래된 원한관계를 하는 일.
모용선비는 줄기차게 고구려를 침입, 미천왕의 묘를 파 시신을 훔쳐가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까지 인질로 잡아가는 패악을 저지른 종족.
대왕은 후연을 여러차례 공격, 3천여리나 쫓겨다니게 만든다. 대왕은 후연을 멸망시킨 후에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잔여세력이 그 지역을 계속 지배하게 만드는 정책을 썼다. 이는 신라와 백제를 원격 조정하는 통치 방식과 맥을 같이 한다.
대왕은 영락9년, 신라의 요청을 받고 5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가 신라를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뒤 조공을 받는 나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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