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 가운데 민초들과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민초들이 질긴 생을 이어가는 동안 삶 한가운데서 그들의 기와 혼을 다스려온 그것은 무엇일까.
민초들의 삶의 희로애락 속에는 죽은 이들의 넋이 서려있고 조상들의 영혼도 스며있다. 실상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우리의 것. 그 중에 민초들의 고통과 슬픔, 원과 한을 달래고 절망속에 허우적거릴때 희망을 던져주었던 정신적 고향.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면서 아픔과 위로를 함께 나누던 민초들의 들풀과도 같은 끈질긴 생명력. 그네들의 정신적 고향은 그동안 우리가 우리것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겨왔던 무속(巫俗), 굿 이었다.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하는 산신령과 '황씨부인신'이 공존하며 이중적 무속신앙 구조를 간직한 일월산.
해와 달의 영기(靈氣)를 한몸으로 받아 영험이 온축됐다는 일월산은 수백년을 민초들의 애환과 슬픔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끝자락에 우리는 3개월을 기다려 만신(신내림을 받은 무인)들의 굿판을 보게됐다.
일월산이 사람들로 붐빈다. 영양군이 일월산의 영험을 모티브로 한 토템공원 조성과 굿 축제를 기획 발표하면서 무속의 실체와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일월산 중에도 신의 영험이 가장 잘 보인다는 선녀탕 골짝 아랫공터에서 성대한 굿을 마련한 것이다.
노랑머리와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가장 한국적 문화의 실체를 보기위해 일월산으로 찾아왔다. 한국무속문화총연합중앙회 소속 만신 200여명과 이들을 좇아나선 중생과 민초들도 수백명이 넘게 몰려왔다.
하늘의 빛이 직선으로 머리위에 내리 꽂히는 정오 녘에 시작된 굿판은 어스럼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린 저녁나절까지 계속 된다.
천간지지 열두신장·천지신명 옥황상제·팔도명산 산신천왕·팔만사천 용왕대신·이월영두 제석천왕·개국시조 단군천왕.
이들 무속인들이 하늘과 땅, 바다와 팔도명산, 단군신을 비롯 우주만물에 서려있는 신장들을 일월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박수무 장태문(53·한국무속문화총연합중앙회장)법사가 일월산신을 모시는 천왕굿을 벌인다. 꽹과리 소리가 자지러진다. 한을 담은 풍장소리가 일월산신을 깨운다."어허 어허 원통하다 누가 나를 부르는가. 팔도명산 대신님네 일월산신 원통하다" 장 법사는 이내 속계와 신계를 넘나든다. 일월산신이 되고 접신(接神)의 소리로 공수를 왼다.
"아모성 아모댁 조상님네 굿 받어 잡수러 오실제, 젊은이 봇짐 늙은이 주량, 울어 넘든 일월산, 원통하다 원통하다, 허어허 허허어∼여"
공수가 거듭되면서 일월산신이 굿판에 들어선다.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한을 한 몸으로 품고 살아왔길래 이리도 힘들게 납시는가.
장 법사는 이윽고 일월산신을 굿판 좌장에 모신다. 한바탕 너울 춤을 춘다.
자진모리 가락이 휘모리로 몰아친다. 남무(男巫)와 무녀(巫女)들은 저마다 창과 칼을 양손에 들고 팔다리를 너풀댄다. 온 몸이 땀으로 젖었건만 지칠줄 모를 춤과 가락이 계속된다. 무속인들은 점점 깊이 신계로 몰입해가고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온다.
접신의 굿판. 접신의 무아지경 상태의 굿판은 수십여분이나 계속 이어진다.
구경온 민초들 사이에서도 무언가 간절함을 염원하는 비손치성과 중얼거림으로 속세의 중생과 신들이 한바탕 어우러져 억겁세월의 한을 풀고 있다.
붉은 옷과 푸른 조끼, 군졸 형상을 한 장태봉 법사가 신들 속으로 나선다.
시퍼렇게 선 두날 작두칼을 들고 펄쩍펄쩍인다. 한 모금 술을 입에 머금어 칼날에 뿜어댄다. 금방이라도 베일것 같던 칼날을 혀끝으로 문지른다. 신력이 모아진 것일까. 선홍빛 피로 물들어야 할 혀끝은 아무렇지도 않다.
신의 영험을 보여준 듯 한바탕 춤굿이 계속된다.
장 법사는 통째 배를 가른 돼지 한마리를 등에 훌쩍 메고 사방을 뛰어다닌다. 큰 굿판에 제물로 바치면 복덕을 받는다고 믿는 중생들이 선뜻 굿 제물로 내놓은 돼지다. 이날 굿판에는 3마리나 제물로 올려졌다. 보기드문 큰 굿판인 셈이다.
무악이 점점 휘몰아친다. 굿판에 벽돌과 쌀, 됫술병과 삼지창이 준비된다. 한참 신계를 돌아다니던 장 법사는 돼지를 내려놓고 삼지창으로 내리 꽂아 번쩍 치켜든다.
신력이 깃든 한쪽 팔로 통돼지를 들어 올린다. 준비된 벽돌위에 쌀을 고르게 깔고 위에다 됫술병을 놓는다. 통돼지를 꽂은 삼지창을 술병 주둥이위에 올려 신력을 모은다.
일월산신의 영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중생들과 민초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로 몰려들거나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삼지창을 지탱하던 손을 치운다. 돼지는 쓰러지지 않은 체 그대로다.
"바람타고 구름타고 빛을 타고 오신 신장님 일월산신 신장님 어여허 어여허 한풀이로세 신장님의 영험이로세"
장법사는 공수를 읊조리면서 부채로 돼지를 내려친다. 돼지는 미동조차 않는다.이윽고 돼지를 제물로 올린 중생을 제단으로 불러 세우자 그의 품 속으로 빨려들듯 돼지가 넘어진다. 신이 호응하고 강복(降福)한 것이다.
장 법사는 한바탕 춤을 추면서 천간지지 열두신장을 차례로 불러들인다·이미 그의 몸은 속세의 것이 아니었다.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쓴체 양말을 벗고 정화수에 발을 씻는다. 높게 만들어진 작두신장터에 올라선다. 보기만해도 섬뜩한 작두칼이 햇빛을 받아 번뜩인다.
가락은 최고를 내 달린다. 한참이나 신장을 염원하던 장 법사는 순간 맨발로 작두위를 오른다. 작두위에서 춤을 춘다. 이리저리 걸어보기도 한다.
신의 두번째 영험을 보여준 것. "약을 가져오너라"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벼락같은 호통으로 꾸짖는다. 무녀들은 술과 안주를 대령하고 장법사는 작두신장으로 화해 술을 벌컥인다.
일월산 계곡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몰아쳐 작두신장터의 대나무를 흔든다.
마지막으로 굿판을 찾은 중생들의 상문살을 일일이 풀어준다. 박인형(45·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무녀는 작두를 갈아 칼날이 시퍼렇게 서야 비로소 작두신장이 오신다며 굿판 말미에 흰 광목천을 작두날로 끊어 나눠준다. 중생들은 비손염원하며 흰천을 받아 혹시 끼어 있을지도 모를 살을 푼다.
굿판 가락이 사그라들고 하정자(49·영천시 청통면)무녀가 황씨부인 넋두리를 벌인다. 힘없는 춤사위, 고개숙인 무녀.
"애고애고 내 딸들아 일월산속 수년동안 치장한번 못했구나"황씨부인의 넋두리는 계속된다. "머릿기름 얼굴분 바르고 맵시좋게 나오신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녀는 황씨부인이 되어 죽창찔려 죽은 이, 총맞아 쓰러진 이, 돌깔려 횡사한 이 모든 원혼들의 왕생을 바라고 한을 풀어내며 한없이 흐느낀다. 마지막으로 김애화(46·대구시 남구)무녀가 도당(일월산)을 지키는 대감을 위로하는 대감굿을 벌인다. 일월산 그림자가 굿판을 감싸고 계곡바람이 무속인들의 땀을 식힌다.
중생과 민초들의 한과 슬픔, 조화롭지 못한 모든 것들을 던져 풀어낸 굿판이었다. 함께 어우러져 맺힌 것들을 풀어내고 다시금 평온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하늘과 땅의 조화를 관장하고 인간의 복덕을 점지해주는 신들이 모두 돌아간 일월산에는 속계라 믿기지 않을 더없이 넉넉한 평온이 고즈넉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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