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통일과 평화-한국과 독일

입력 2000-07-17 00:00:00

'남북한 문제'를 전공하는 사람으로 자처하지는 않는다. 그런 전공학문이 있는 것인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동서독 문제'를 지난날 가까이서 한동안 지켜보고 생각해본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961년 8월 13일 새벽, 동.서 베를린의 경계소에 악명높은 '장벽'이 구축되었을때 나는 독일에 있었다. 모 신문사 상주특파원으로 현장을 취재했었다.

1989년 11월 9일 밤.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뚫리고 무너지기 시작할때도 나는 독일에 있었다. 대학에서 안식년을 얻어 방문교수로 독일에 가 있어서 다시한번 역사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1961년 시내 한복판에 분단의 장벽이 구축될 당시 서베를린 시장은 빌리 브란트였다. 나는 당시 독일에 상주하면서 브란트가 시장에서 연방정부의 외무부장관 겸 부총리로 나가고 마침내 연방정부 총리로 선출되는, 말하자면 한 '스테이츠맨(국가적 인물)'의 형성과정을 소상히 살펴 볼 수 있었다.

1969년 집권한 브란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그의 '동방정책'을 밀어붙여 동유럽제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동서독사이에도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유럽의 긴장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197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타게 되었다. 그것은 다 아는 일이요 새삼스러이 거론할 것도 못된다.

다 알지 못하고 새삼스러이 논의돼야 할 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하필이면 같은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에서나 민간에서 끈질기게 오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방정책의 기본철학이나 주도동기에 대한 이해가 없이 밖으로 드러난 성과만을 모방해보려는 시도가 1972년의 7.4공동성명서에서,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이른바 '북방정책'을 변함없이 일관해왔다. '김일성 주석'과 '때려잡자 김일성'을 오락가락하고 '북한괴뢰'와 '조선민주주의인문공화국'을 오락가락하는 구호는 바로 그처럼 뚜렷한 기본철학 없이 표류해온 대북정책의 상징적인 수사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서독의 동방정책이 어떻게 한국에서는 오해되고 있고, 잘못 이해한 바탕위에서 그 겉치레만 흉내낸 한국의 북방정책과 서독의 동방정책이 어디에서 기본적으로 다르냐 하는 것을 우선 총론 수준에서 약기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끈질기게 지녀온 가장 큰 오해는 서독의 동방정책을 독일의 '통일정책'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오해는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그 이후 슈미트를 거쳐 1982년 야당 기민당의 콜이 총리가 된 뒤에도 서독의 역대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끝에 마침내 1990년 동서독이 통일하게 됨으로써 더욱 큰 힘을 얻게 된 듯도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분명하게 다시 밝혀둬야 하는 것은 동방정책이 독일의 통일정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란트는 서독의 건국이후 역대총리 가운데서 처음으로 정부의 온갖 시정연설문에서 '통일'이란 낱말을 완전히, 그리고 일관되게 배제하였다. 비단 수사학적인 차원에서만 '통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부기구의 차원에서도 그가 집권한 1969년, 그때까지 존재했던 '통독성(統獨省)'을 없애버리고 그대신 '양독성(兩獨省)'을 신설했다. 요컨대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독일의 '통일정책'이 아니라 '비(非) 통일정책'이었던 것이다.

물론 동서독의 역사적인 통일에는 동방정책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세계가 주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독의 '통일정책'이 아니라 저명한 언론인 테오 좀머가 절묘하게 지적한 것처럼 "서독의 비통일정책이 독일의 통일을" 재촉했던 결과이다.

그렇다면 동방정책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원작자 브란트의 책제목 그대로 '유럽의 평화정책'이었던 것이다. 서독은 통일이냐 평화냐의 선택지에서 '평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를 놓고 통일도 평화도 다 챙기겠다고 버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치 그것이 가능할 것처럼… 순진하게도….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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