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생 생존소식 접한 대구 김치려씨

입력 2000-07-17 00:00:00

"아들을 그토록 찾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게 돼 너무나 기쁩니다"대구시 북구 태전동 현대아파트 102동 1206호 김치려(74)씨는 16일 밤 TV를 통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 김치효(69)씨가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세기동안 가슴속에 사무친 통한을 씻어냈다.

경북 경산에 사는 맏형 김치원(85)씨도 이날 적십자사 등을 통해 수십 번 동생의 생사여부를 확인한 뒤 장롱속에 소중히 간직해 둔 동생의 빛바랜 사진을 어루만지며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김치려씨는 "동생은 7남매 중 여섯째로 1950년 경북중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엘리트였다"며 "서울 돈암동에 동생의 하숙집을 구해주고 형과 함께 동생의 입학식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며 동생의 청년시절을 얘기했다.

6·25가 터지고 동생과 연락이 끊긴 후 김씨는 서울수복때 하숙집을 찾았으나 하숙집은 쑥밭이 돼 있었고 동생의 소식은 아는 이가 없었다. 온 가족이 미친듯이 치효씨 찾기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십년동안 서울대학교, 하숙집, 친구 등을 찾아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이 끊긴 50년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대구역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10여년, 아버지는 끝내 가슴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후 김씨 가족은 1960년부터 동생이 매년 칠월 칠석날 집(당시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인근 절에서 동생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동생을 찾지 못하고 어깨가 축처진 채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볼때마다 가슴이 아팠지요. 이제 아버지의 유언을 뒤늦게나마 지켜드리게 돼 다행스럽습니다"자신을 친누나처럼 따랐다는 김씨의 아내 오두남(74)씨는 "결혼 후 시동생과 2년동안의 짧은 만남 뒤 반세기동안 생이별이 이어질지 누가 알았겠느냐"며 시동생과의 만남을 손꼽았다.

김씨 가족은 동생과의 첫 만남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선물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 '아버지의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다.

"동생과 함께 경북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아버지·어머니 산소에 같이 갈 수 있도록 정부와 북한에서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생의 생존소식에 흥분해 있는 치려씨의 소박한 희망이다.

李鍾圭기자 jongk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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