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리더의 조건

입력 2000-06-23 14:46:00

초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블록버스터 '글래디에이터'는 로마제국시대 한 검투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통해서 왕권을 둘러싼 음모와 투쟁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암살하고 황제가 된 코모두스에게 민중은 냉담하다. 반면 죽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막시무스 장군은 검투사로 전락하여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민중의 열렬한 성원을 받는다. 막시무스를 흠모하던 황제의 누이는 그에게 황제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줄 것을 청한다. 그가 자신은 군중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밖에 없다고 하자 그녀는 그것이 힘이라고 말한다.리더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한 집단이나 조직의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보상과 처벌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된 합법적 지위를 가지거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소유하거나 또는 부하들이 호감을 가지며 존경하고 그들의 동일시 대상이 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권력기반이 많을수록 큰 힘을 지니게 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나 낙하산 인사로 조직을 맡은 관리자는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전문성도 부족한데다 존경받기는 아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원시적 권력인 보상 및 처벌권만 가지게 되므로 효율적인 리더가 되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검투사 막시무스처럼 구성원들로부터 존경받음으로써 생기는 이른바 '참조권력'은 진정한 충성심과 순종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권력기반이지만 웬만한 리더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파격적 스타일에 대해서 계산된 행동이라는 지적부터 회담의 최대 수혜자라는 찬사까지 다양한 말이 나오고 있다. 어쨌든 괴팍하고 호전적이라는 김정일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개선된 것은 분명한데,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TV화면에 생생하게 비친 그의 행동이 그동안 국민들이 지니고 있던 극도로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너무나 대비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충격효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의 행동은 북한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음으로써 생기는 자신감, 즉 참조권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처럼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우상화 정책을 통해 대중에게 절대자의 허상을 심어줌으로써 참조권력을 창출해 내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우상화가 불가능한 체제나 조직에서는 참조권력을 얻기 위한 뾰족한 방법은 없으나, 리더십 연구자들은 리더가 구성원들의 욕구에 관심을 갖고, 공정하게 대하며 솔선수범하여 역할 모델이 될 것을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가 구성원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직접 만남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는 국민의 곁으로 가까이 가지 않는 리더는 국민이 진정 원하고 생각하는 바를 가장 늦게 알게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중이라는 샘 속에 리더 자신을 빠뜨리지 않으면 만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을 대통령, 사장, 총장만은 모를 수밖에 없다.

사회심리학자 어빙 제니스는 리더의 결정을 흔들리게 하는 반대 정보를 차단하는 부하를 '마인드가드(mindguard)'라고 부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리더가 이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보디가드가 리더를 신체적 상해로부터 보호한다면 마인드가드는 리더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예방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정보를 검열하여 선택적으로 보고하고, 반대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의사표현 기회를 봉쇄한다. 결국 구성원의 뜻을 헤아리려면 마인드가드의 장막을 걷고 구성원 속으로 직접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정당, 기업, 대학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권위의식으로 군림하기보다 밑으로부터 진정 존경받는 리더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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