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며

입력 2000-05-03 00:00:00

우리 남편은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해달라고 아기처럼 조를 때가 가끔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옛이야기나 명작동화 같은 것을 들려주면 재미있다고 하나 더 해보라고까지 한다.

그러면 "이 이야기도 몰라" 무시하면서 아이에게 하듯이 최근에 읽은 옛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준다. 그리고 아이의 동화책을 남편보고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후에 아이가 아빠보고 이야기 해달라면 창피해서 어쩔 거냐고 나무라보기도 한다.

우리 남편은 시골의 우수한 학생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을 가진 30대 후반 대한민국 보통의 남자이다. 그런데 이런 흔한 이야기 한 편도 제대로 모르는 안타까운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집에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도 모두 농사일로 바쁘시고 기껏 들은 이야기는 '뒷산 늑대가 마을에 내려와 애기를 잡아갔고 공동묘지에서 도깨비불이 휙휙 날아다녔다'는 식의 이야기뿐이었다는 것이다.

나도 많은 책을 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에 살았다는 이유로 시골보다는 조금 나은 형편이었던 것 같다. 우리 시대에 비하면 지금의 아이들은 오히려 책이 홍수처럼 넘쳐서 탈인 세대들이다. 하지만 지금도 도시와 시골의 독서문화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고, 독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환경의 아이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이땅의 아이들은 우리 남편이나 나와 같이 큰 행복 한 가지를 놓치지 않도록, 누구나 책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올바른 독서 문화가 뿌리깊게 정착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더불어 우리 엄마들의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박정희(대구 동화읽는 어른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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