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투표날 이 아침에

입력 2000-04-13 15:10:00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최저(崔杵)는 군주인 장공(莊公)을 시해하고 경공을 옹립, 그 공으로 대신이 됐다. 이를 보고 역사기록관인 태사(太史)는 "최저가 임금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격분한 최저는 태사를 죽였다. 그러자 태사의 아우가 대를 이어 그 사실을 다시 기록했고, 최저는 또 죽였다. 그렇지만 한다하는 최저도 태사의 두번째 아우가 꼭같이 기록하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동안 지방에 있던 기록관이 이 소문을 듣고 서울로 달려왔는데 기록이 지켜졌단 말을 듣고 그제서야 지방으로 되돌아 갔다'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나오는 이 글을 읽으며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자의 자세가 이런 것인가 새삼 숙연해진다.

또 정의로운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끄는 지식계층이 얼마만큼 치열하게 불의를 감시해야 하며 자기 희생이 뒤따라야 하는지다시한번 깨닫게도 된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정의로운 사회란 국민이 깨어있는 그런 나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6일간의 총선기간은 정치개혁을 바라는 많은 유권자에겐 차라리 악몽이었다.

1천40명이 출마한 이번 선거는 쟁점하나 제대로 제기된 바 없이 '저 사람은 세금 안냈고 군대 안갔고 전과자'라고 헐뜯는 것으로 시종했으니 이런 선거판도 드물것만 같다.

악몽같은 총선 기간

장차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 가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돈 뿌리고 욕하다 여야가 적발된 선거법 위반 사례만도 지난 총선때의 3배인 2천450여건에 이른다니 이것이 개혁정치를 내세우는 16대 총선의 진면목이란 말인가.

이번 총선기간중 우리 눈에 비쳐진 정치 지도자상은 나라를 이끌어나갈 경륜도 지혜도 없이 집권욕만 가득찬 '정치꾼'에 다름 아닌 모습이었다.

여야 각당의 총재나 대표조차 제세의 경륜을 제시하고 국민들을 끌어들이기 보다 상대방을 헐뜯고 깎아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스스로 선언한 대통령 후보감이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인들이 얼마나 권력욕앞에 이성을 잃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누가 뭐래도 정치는 국민을 이끌어나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권위가 있어야 되고 국민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기껏 상대후보나 헐뜯다가 지역정서를 앞세워 당선된다한들 어느 누가 존경을 보내고 따를 것인지, 이러다가 우리 정치가 지도력을 상실한채 국민들로부터 왕따 당할까 해보는 소리다.

깨끗한 선거 선진 정치의 출발

깨끗한 선진정치는 깨끗한 선거풍토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집에서 깨진 쪽박 들에 나간들 안깨지겠느냐는 말이 있듯이 이미 과거 어느때보다 혼탁해진 이번 선거를 지켜 보면서 "싹수가 노랗다"는 느낌을 지울길 없어 하는 소리다.비록 273명 국회의원 모두가 높은 경륜에다 고매한 인품까지 갖추기는 어렵다하더라도 최소한도 눈이 시퍼렇게 살아서 국리민복을 걱정하고 국가진운을 열기 위해 노심초사 하는 모습이어야 옳다.

그럼에도 여야 모두 국정에는 관심없이 지난 4년동안 싸움질이나 하며 세월보내다 때가 되니 다시 염치좋게 표 달라는 아우성을 되풀이 하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런 악순환은 이제 우리 손으로 끊을 때가 됐다고 본다.

최선 아니면 차선의 선택이라도

오늘은 16대 총선 투표날이다.

국민대중이 지난 4년간의 정치를 심판 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章)을 여는 날이다.어찌보면 오늘은 이 백성들이 쓰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는 날이라는 생각도 든다이제 2천년전 제나라의 태사처럼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또 한편의 정치사(政治史)를 기록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총선날 전국 관광지 호텔 모두가 만원 예약이라니 이래서는 안된다.

이미 정치권이 자정력(自淨力)을 상실한 이 마당인만큼 우리만이라도 투표에 참여하고 국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상은 못뽑더라도 최악(最惡)의 후보만은 솎아 내야 한다.

이제부터 4년간 국민모두가 서릿발 같은 국정 감시자가 돼야 그나마 정치가 살고 나라가 산다고 믿어진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