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렬 세상읽기-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연?

입력 2000-03-28 14:25:00

우연히 눈길을 준 텔레비전에서 어떤 해설자가 유전자 공학의 성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해설자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색깔이 예전의 것과 전혀 다른 꽃을 우리 나라에서 개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작업의 성과는 미국의 저명한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에 보도될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또한 향기 없는 꽃이 향기를 갖도록 유전자를 조작하여 높은 부가가치와 경제성을 실현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한다. 심지어 한밤에도 꽃을 피우는 꽃에 대한 유전자 연구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한다.

물론 물감을 풀어놓은 물에 담가 꽃의 색깔을 바꾸기도 하고, 인조 향을 사용하여 꽃의 향내를 바꿀 수도 있다. 또한 달맞이꽃처럼 한 밤에 피는 꽃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유전자를 조작하여 꽃의 색깔과 향내를 바꾸고, 일시에 이러저러한 꽃들을 한밤에 피도록 한다? 문득 꽃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초록색 꽃들의 모습을, 화공 약품 냄새를 풍기는 듯한 꽃들의 모습을, 그리고 한밤중에 어둠을 배경으로 너도나도 요란하게 피어 있는 꽃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소름끼치는 요사스러운 전경이 아닐까. 과연 그런 식으로 자연의 질서를 깨뜨려도 되는 것인지? 인간의 눈요기나 호사 취미를 위해 그런 식으로 자연을 갖고 함부로 장난해도 되는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자연의 질서를 뒤바꿔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표인양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들은 마음대로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마치 자연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것인 양. 또한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어도 될 만큼 단순한 것,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 양. 과연 자연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것일까. 또한 자연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세기 초엽 인류가 앞으로 나갈 길을 전망하며 그 해답을 동양에서 찾으려 했던 서양의 어떤 문명 사학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연을 대상화하고 적대화해 온 서양인들이 맞이할 필연적인 파멸을 경고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하는 동양인들에게서 교훈을 얻도록 충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우리 동양인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서양인들을 좇아 자연을 대상화하고 적대화하는 데 골몰해 오지 않았던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제 동양인들은 서양인들보다 더 서양인다워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산업화에 따른 문명 발전? 물론 희생이 따르지 않는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들먹이며, 자연을 훼손하는 대가로 그만큼 우리 삶의 수준이 향상되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공해라든가 그 밖의 재해는 발전의 대가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학대 아래 자연이 언제까지나 참고만 있을까.

유전자 조작을 통해 꽃을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텔레비전 방송 해설자의 모습이 죽음의 바다와도 같은 시화호의 모습과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별것도 아닌 것을 갖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꽃을 갖고 유전자 조작이라는 장난을 하는 것은 시화호라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질이 나쁜 범죄 행위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눈요기나 호사 취미를 위한 것일 수 있기에. 부가 가치와 경제성을 운운하며 자연에 대한 훼손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의 것'만이 아님을, '인간에 의해' 창조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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