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향토출신 재일동포들(23)

입력 2000-03-20 14:20:00

일본 도쿄에 살고있는 경북 의성출신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의성향우회원들의 기부금 3억으로 처음 삽질이 시작됐던 문화체육회관이 완공됐다.

경북 의성군청 부근에 들어선 연건평 약 1천500평에 3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오는 4월 초순 준공식을 가지는데 군청관계자는 행사 당일 재일동포 향우회원들을 초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재일본 의성향우회의 조규화(曺圭化.73) 회장은 회관 준공식 초청에 대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 가는데 더 많은 고향돕기를 하지 못해 늘 아쉽다"고 밝혔다.

소설과 같은 인생을 살아온 조 회장을 만나기 위해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의 토지마(豊島)민단 사무실을 찾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은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선을 타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나는 그때 무작정 가출한 상태여서 우리 가족들은 나를 혼자 일본에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약 10만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도쿄상가협동조합을 이끌고 있는 그는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독특한 인생스토리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자식을 위해 약간의 생활비와 옷가지, 이불 그리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배급표를 먼 친척에게 맡겼다. 나중에 아이를 꼭 데려가겠다며 뒷일을 부탁하고 출항직전의 귀국선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전후 사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혼란기였다. 이 친척은 그의 물건들과 부모들이 필사적으로 모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던 배급표를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17세의 나이로 일본땅에 혼자 남겨진 조규화 소년은 당장 밥을 굶게됐고 따라서 불량배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후 야생마처럼 살아갈 그의 길고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조 회장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던 그해,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를 떠나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와 철공소에 취직했었다. 그는 두살이 됐을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일본으로 들어왔다. 부모 아래 티없이 자란 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일본아이들에게 이지매를 당하며 반항적인 성격을 키워갔다. 그곳은 일본인들이 많고 한국인들은 별로 살지 않는 곳이어서 교실에서의 조센징이라는 놀림도 심해갔다. 특히 그는 어릴때 이름이 규팔이였는데 일본아이들은 언제나 '곰팔이'라며 놀려대는 바람에 매일같이 코피가 터지도록 싸우기도 했다. 그래서 성격은 갈수록 삐뚤어져 약소민족이라는 원한을 품고 점점 불량배처럼 변해갔다.

혼자가 된 그는 친구를 좋아하며 불의를 보고는 참지못하는 성격에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조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때 포로수용소에서 불량청소년들을 모아 일을 시킬때 그곳에 수용돼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직업을 전전할때 가장 괴로웠던 일은 조센징이라며 괴롭히는 것이 가장 괴로웠어요. 간혹 어떤 일본인들은 '너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간단히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그는 "나는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 아니다. 너희들이 우리 동포들을 강제로 연행해 왔다. 옛날에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모르는 일본인들 많다. 나는 해방후에도 일본에 남아 이 사실들을 증명하고 있다"며 대들었다고 한다.

그는 도쿄 상가협동조합의 고문으로서 일을 보면서 극동(極東)회 회장으로 추대된 후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타고난 명석한 두뇌와 참을성으로 폭력배들로부터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호했다.

그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신임이 높아가고 어느정도 지위를 확보한 그는 약한 사람과 한국 동포들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특히 재일동포들이 경영하는 영세 업소에는 일본의 야쿠자들이 금품을 뜯어가는 일이 많았다.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그는 어려운 동포들이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서 불량배들의 출입을 막아주는 등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되돌린 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명치대학을 나와 민단관계일을 보던 김희숙(金熙淑.73)씨는 같은 의성출신으로서 조회장에게 뿌리찾는 일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조국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탐문을 거듭해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부모가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고 고향을 방문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 죽은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돌아오자 이미 나이많은 부모와 몰려든 일가친척들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30여년만의 만남을 가진 그는 조국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일본에 살고있는 동향인들을 모아 의성향우회를 조직하게 된 것.

그는 해마다 약 600만엔 정도의 기금을 향우회를 위해 희사해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 3천만엔 이상을 내놓고 있다.

그밖에 도쿄한일친선협회와 재일 경북도민회, 대한합기도 협회의 고문으로서 또한 서울 리라학원의 명예이사장으로도 활동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기자와 헤어지면서 그는 "두살때 부터 일본서 성장했고 지금은 1만명이 넘는 일본인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지만 고향 탑리를 찾을때 마다 역시 자신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朴淳國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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