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모 섬유업체 대표 ㄱ씨. 4개 회사에 45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연간 2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중견 기업인이지만 아직 여권이 없다. 지금껏 해외여행 한번 안했다는 얘기다. 심지어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제주도를 가 본 적도 없다면 믿을까?
97년 외환위기 이후 수그러들었던 과소비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대구 한 백화점 명품매장. 전국 백화점 중에서도 고가의 외국 브랜드 입점 업체가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60만원짜리 구두, 80만원짜리 가방, 수백만원짜리 옷이 예사롭게 팔려나간다. 지난해 매출은 8억5천만원으로 98년 6억5천만원보다 30%나 늘어났다. 백화점측은 올해도 이 같은 신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입점 브랜드를 98년 9개, 99년 11개에서 올해 13개로 늘리기로 했다.
대구시내 한 수입 가전제품 매장에선 요즘 국산보다 2배 이상 비싼 미국제 대형 냉장고가 하루 3대꼴로 팔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재 수입은 1년전보다 42% 증가했다. 특히 냉장고 298%, VTR 216%, 골프용구 86% 등 사치성 소비재가 크게 늘었다.
해외여행도 급증세다. ㄱ관광여행사는 지난해 중순부터 해외 여행객이 98년에 비해 30% 늘었다고 말했다. ㅅ여행사는 동남아 노선의 올봄 주말 예약률이 100%인 것을 비롯해 70%이상 높은 예약률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올해 해외노선 수요가 지난해보다 17%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출국한 내국인은 434만명으로 98년 306만명보다 41%나 늘었다. 지난해 1월 28%였던 관광목적 출국은 12월 35%로 뛰었다. 씀씀이도 늘어나 지난해 관광지출은 291만달러로 98년보다 56% 늘었다. 1인당 해외여행 경비 역시 99년 1분기 996달러에서 2분기 1천59달러, 3분기 1천96달러, 4분기 1천98달러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경제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다시 과소비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유통업체들의 소비조장 영업전략을 꼽을 수 있다. 서울의 한 백화점은 지난 여름 고소득층을 주고객으로 하는 영업전략을 세우고 초고가 해외 명품 위주로 장식했다. 서울 강남지역 백화점에서 비롯된 이같은 고급화전략은 현재 전국으로 확산중이다.
해외 브랜드들의 집중 공세도 무시할 수 없다. 최저 600만원부터 다이아몬드가 박힌 수억원대까지 망라한 초고가 시계 브랜드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등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 유명 브랜드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뿌리깊은 과소비 행태와 해외 유명브랜드 선호 취향 탓이다. 주식투자, 벤처기업 열풍 등으로 신흥부자가 급증한 것은 이를 부채질했다.
1인당 GNP 1만달러를 달성한 시점에서 외제 소비재 수입액은 우리 나라가 일본의 3, 4배에 이르며, 400ℓ 이상 대형 냉장고 보유가정은 일본이 전체의 23%인데 반해 우리는 56%나 된다는 연구가 나와 있을 정도다.
특히 증권부자로 상징되는 신부호층의 씀씀이는 90년대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과소비 열풍보다 더 심하다. 서울에서 600만~800만원짜리 해외여행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지난해 40평이상 중대형 아파트 분양이 42% 늘었다는 뉴스는 이를 증명하는 작은 예다.
문제는 과소비와 해외 브랜드 선호가 소비자 개인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소비자연맹 대구지회 이영옥 지회장은 "부유층의 소비 행태는 전시효과를 통해 중.저소득층의 과소비로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특유의 냄비문화와 유달리 강한 동질성의식은 급속한 동조소비를 유발하고 그 결과는 가계파탄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소비는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다. 그러나 사회병리현상을 초래하는 소비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글머리에 든 ㄱ씨의 사례를 모두 본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타 계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덜게 하고 국부를 보전하는 현명한 소비자세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李相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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