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낙천·낙선운동의 빛과 그림자

입력 2000-02-04 00:00:00

최근 우리는 경실련·총선연대·공선협 등 각종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부적격 국회의원의 낙천·낙선운동을 목격하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4년만에 단 한번 투표를 함으로써, 기껏 그 자신이 주권자임을 의식하곤 했던 국민은 이번의 시민운동을 통해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라도'이들 국민의 대의원들을 평가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엄연한 권리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로 하여금 지난 해 12월 시애틀에서 개최된 국제무역기구(WTO)의 활동에서 느끼던 감회를 새삼 반추하는 기회를 갖게 했다. 이는 구성원의 의사나 통제로부터 벗어나 방자하게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국가기구나 국제기구, 또는 대규모 조직은 이제 더 이상 비정부 시민단체의 감시와 통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전세계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시민단체의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국제적 추세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같은 시민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국회의원 출마예상자의 낙천·낙선운동이 가지고 있는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장래에도 지속될 시민운동의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번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결코 우발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들은 지난 수년동안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국회의 여러 활동을 모니터하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국회의 태만을 지적해 왔다. 그러다 임박한 4·13 총선을 계기로 국회의원의 행동에 식상한 국민들의 여망을 업고 낙천·낙선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각종 시민단체가 이런 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사전에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었던가를 스스로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시민단체들의 '경쟁적인'명단발표에서 드러난다. 개개 시민단체는 운동의 목표가 다르기에 발표자 명단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정기준이 명료치 않아 누락시비나 추가명단 발표라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당초 의도와는 달리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필자가 주목하는 시민단체의 준비부족은 이번 낙천운동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성찰의 부족이다. 시민단체의 낙천자 명단 발표는 기존 정당 공천의 결함,즉 각 정당 총재나 계보 보스가 밀실에서 행하는 공천심사를 불신하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이번의 낙천·낙선운동은 명단의 발표와 병행하여 각 정당의 공천과정이나 구조개선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구속력이 없는 명단발표와 그것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낙선운동으로의 연결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있는데 그치고 있다.

그외에도 필자가 우려하는 점은 모든 시민단체의 '정치화'다. 필자는 모든 시민단체가 어차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모든 시민단체가 지금까지의 운동 목표나 방향을 모두 내던지고 일거에 낙천·낙선운동에 몰려드느냐 하는 점이다. 환경단체면 환경문제, 경제단체면 경제문제, 여성단체면 여성문제와 관련해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시민단체는 너나없이 비슷한 기준에 의해 낙천자 명단을 발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시민단체를 부정적인 의미에서 정치화시키고, 그들의 순수한 의도가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필자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단체의 엘리트주의다. 시민단체가 높은 시민의식을 가진 엘리트에 의해 형성·주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바로 이런 이유로 하여 높은 윤리의식이 전제돼야 한다. 스스로 역사적인 소명을 자임하고 나선 의식있는 시민들의 단체이기에 그들에게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강한 독립성과 부패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염결성(廉潔性)이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단체는 이러한 점에서 가끔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최근의 낙천자 명단 발표에 대한 김대통령의 호의적 반응을 액면대로 수용한 시민단체의 태도는 이런 점에서 주목된다. 다시 말해 시민단체는 대통령의 우호적 반응과 그들 자신의 행동사이에 일정한 구획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호의적 반응은 수용하고 적대적 반응은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엘리트주의를 취하지 않았는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선거법 불복종을 선언한 시민단체가 노회(老獪)한 정치가들의 불법선거운동을 어떻게 막을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우리 근대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건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운동의 성공여부는 오는 4월 13일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공감여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이 운동은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다.

고려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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