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렬 세상읽기-새 천년을 맞이하며

입력 2000-01-04 00:00:00

정월 초하룻날 잠에서 깨어 내다본 바깥의 아침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다. 어제와 다름없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밤 TV에서 보았던 광경들이 마치 꿈속의 장면들 같이 느껴진다. 새 천년을 앞두고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던 장소로, 또는 새 천년의 벽두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 해돋이 현장으로 몰려가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 지난 밤 또는 오늘 새벽의 감동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들떠 있는 것은 아닐지. 아니면, 감동을 잠재우고 꿈나라에 가 있는 것은 아닐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처럼 잠에서 깨어나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에 새삼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새 천년의 시작에 감격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그들은 곧 새 천년의 시작과 관계없이 세상은 여전하다는 엄연한 사실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기야 인간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바꿨다고 해서 그날로 지구 주위를 돌던 태양이 멈춰 서고 멈춰 서 있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 천동설을 주장하든 지동설을 주장하든 우주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운행 원리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 운행 원리에 따라 서기 1999년 12월 31일에 졌던 태양은 서기 2000년 1월 1일에 다시 떠올랐던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1999년 12월 31일 이전에 맞이했던 태양과 서기 2000년 1월 1일에 맞이한 태양 사이에 무언가의 의미 차이를 두려 한다. 그리고 2000년 1월 1일을 무언가 특별한 날인 양 생각하려 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몰입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지는 인간에게 본능적인 것인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 천년의 시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사람들의 마음 자체는 크게 문제삼을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다만 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마음이 지나친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TV 화면을 통해 본 몇몇 행사장의 모습은 의미 부여의 경지를 뛰어넘어 야단스러움의 경지에 이르고 있지 않았던가. 문득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떠오르는 해의 불씨를 성공적으로 채화할 수 있었다는 소식을 전하던 1월1일자의 TV 화면이 생각난다. 이렇게 채화한 불씨와 우리 나라 어디어디에서 채화한 불씨를 섞어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던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긴 하나,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채취한 불씨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것과 우리 나라 어디에선가 채화한 불씨를 뒤섞어 그것을 영구 보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발상은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그러나 어느 논객의 말대로 사소한 것은 사소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소한 말짓거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불씨 채화의 사소함이나 지적하고 있는 나의 사소함이란!

나의 사소함을 한탄하는 이 순간에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위를 돌고 그 지구 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현실적 삶은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새 천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 근본적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새 천년의 시작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는 자제해야 한다. 이런 시도들은 자칫 들뜬 마음과 막연한 기대를 반영하는 공허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돌연히 서기로 2000년인 올해가 단기로는 4333년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신문 상단의 구석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단기 4333년이라는 말에 우리는 과연 사소할 정도나마 신경을 쓰고 있는지.〈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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