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인상파 대가 모네

입력 1999-11-25 14:06:00

어떤 사람은 강한 바람에 자신의 소유와 삶의 터전을 잃지만 어떤 사람은 그 바람을 이용해 곡식을 빻고 전기를 만들기도 한다.

시련이란 바람과 같은 것 아닐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하늘만 원망하는 사람에겐 파멸을 선사하지만 이를 자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큰 선물을 안기는.

청각장애로 고통받았던 악성 베토벤은 알아도 시각장애를 극복한 인상파의 대가 클로드 모네(1840~1926)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화가들에게 치명적인 장애.

하지만 모네의 작품세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시력저하는 사형선고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내에서 사물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던 이전 시대 화가들의 작업 방식에 반기를 들고 작가의 동공을 파고드는 빛과 색채의 현란한 눈부심을 표현했던 작가였기 때문이다.

스승에게서 배운 고리타분한 명암· 원근법만을 답습했던 미술관행에 반기를 든 인상파 화가들은 균형잡힌 구성, 정확한 소묘보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치중했다.

그 선두에 섰던 모네는 태양이 하늘과 바다와 배에 던지는 색채의 조각들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 '해돋이 인상'으로 인상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이 변형시키는 대기와 사물의 아름다움, 그 찰나의 최대치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모네의 예술관은 포플러, 노적가리, 국회의사당, 루앙 대성당 등 같은 대상을 수십번에 걸쳐 반복해 그린 연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똑같은 사물이 계절이나 날씨, 태양의 위치에 따라 어떤 색채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인상파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모네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1900년대초. 60대에 접어들면서 화가로서 농익은 기량을 과시하던 그에게 백내장 초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이야 간단한 수술로 고칠수 있지만 당시 백내장은 불치에 가까운 질병이었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을 느끼는 모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색채는 예전처럼, 찬란하지 않네. 더 이상 정확하게 빛의 미묘한 차이를 그릴 수 없어. 붉은색은 진흙처럼 보이고 핑크색은 김이 빠진 듯하고 중간 이하 색조는 내 눈을 완전히 피해간다네'.

뜨거운 태양아래 하루 온종일 걸려 그린 그림을 찢어버리길 수십차례.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미묘한 색채 유희는 더 이상 시도할 수 없지만 어두운 색조에 둘러싸인 선명하고 강렬한 색과 형태만은 예전만큼 또렷이 볼 수 있다네. 이게 새로운 구성의 시작이 되었네. 어떻게 이걸 잘 이용할까?'

지베르니에 작업실을 마련한 모네는 수련으로 가득한 정원을 모델삼아 생의 마지막 작업인 '수련' 연작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시력이 약해지면서 그의 작품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한때 튄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초록색, 붉은색을 즐겨 사용했지만 노년의 캔버스는 황토색, 분홍색 등 중간톤의 색채가 완벽한 상호작용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시력저하로 사물의 윤곽을 뚜렷하게 볼 수 없어 작품의 형태가 갈수록 모호하고 난해해진 것도 특징. 어떤 작품은 '수련'이란 제목을 붙였지만 수련이라기보다 같은 색채의 덩어리가 화면을 채운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모네의 작업이 20세기 추상회화시대의 개막을 예고한 것이었음은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다.

'작업을 해야합니다. 시력을 다 잃기 전에 모든 것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너무 무력해지지 않고 좀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진보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초조하게 작업하던 모네의 안타까운 열정은 그의 편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1926년, 그는 백내장으로 완전히 실명한 며칠 뒤 세상을 떠난다. 스러져가는 시력속에서도 '수련' 연작을 제작해 진정한 대가로 거듭난 모네의 생명과 햇빛이 주는 인상을 포착했던 그의 시력은 온전히 하나였던 것이다.

金嘉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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