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36·주니치 드래곤즈)은 전국 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고교시절부터 은퇴를 결심한 일본 프로야구까지 항상 최고 선수라는 영예를 달고 다녔다.
선동열이 야구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광주일고 재학 때인 80년 봉황대기 1회전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세우면서부터였다.
광주일고 전성기를 연 선동열은 고려대 재학중이던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로 뽑혀 세계적인 선수임을 입증했다.
선동열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던 85년부터 95년까지 11시즌 동안 단 1시즌도 방어율이 2점대로 올라간 적이 없을만큼 뛰어난 구위를 유지했다.
'꿈의 방어율'이라는 0점대 방어율만 5차례나 이룬 선동열의 공은 말 그대로 타자들이 운에 맡기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선동열이 국내 프로야구에 남긴 기록은 146승40패 132세이브(통산 방어율 1.20)로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는 물론 앞으로 프로무대에 뛰어들 어떤 선수도 좀체 이루기 어려울 대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동열이 거둔 통산 146승의 기록은 아직도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고 있으며 통산탈삼진 1천698개 역시 그대로 한국프로야구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데뷔 이후 시즌 20승을 3차례나 이뤘으며 다승왕을 4차례나 차지, 선발투수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동열은 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뒤 3년간 구원왕 2차례를 차지하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퍼레이드의 주인공이었다.
선동열은 또 입단계약금으로 85년 1억3천800만원을 받아 억대 계약금 시대를 열었으며 국내를 떠날 때까지 연봉1위를 어떤 선수에게도 양보하지 않은 '국보급 투수'였다.
시속 150㎞를 넘나드는 빠른 직구와 예리한 슬라이더를 주로 던지며 '무등산 폭격기'로 불렸던 선동열은 당시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이 지레 겁을 먹고 경기를 포기할만큼 돋보이는 존재였다.
지난 96년 일본으로 건너간 선동열은 첫해 생소한 일본 타자들에게 두들겨 맞는 아픔을 겪었으나 이듬해인 97년부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 3년간 일본에서도 최정상급 투수로 우뚝 섰다.
97년 1승38세이브, 98년 3승29세이브, 99년 1승28세이브 등 연속 30세이브포인트를 돌파하면서 선동열은 4년간 단 4차례만 패전기록을 남겨 '나고야의 수호신'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특히 선동열은 일본무대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한국야구의 위상을 일본에 널리 떨쳤을 뿐 아니라 이상훈, 이종범 등 후배들이 거액의 연봉을 받고 일본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감한 선동열은 한국프로야구 뿐 아니라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신화적 존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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